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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에밀 시오랑 | 챕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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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는가?

 

 

 

"나는 폭발하고 침몰하고 분해되고 싶다. 

그래서 나의 파괴가 나의 작품, 나의 창작물, 나의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

 

슬픔, 절망, 고독, 분노, 증오, 허무, 죽음…. 에밀 시오랑(Emil M. Cioran)에게 생(生)의 비극은 외면이나 기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맞닥뜨려야만 하는 결연한 의지의 대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태여 이겨내야 할 대상 역시 아니다. 직시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절망에 빠진 우리를 함부로 위로하지 않는다. 산산이 부서짐을 자처하며 완성한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가 유의미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갖 생의 비극 안에서 나약해지기 마련인 우리에게 절망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를 바꾸면서 나는 내 인생의 한 시절과 결별했다."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 출신이지만, 1937년 프랑스로 이주한 뒤로는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가장 완벽하고 우아한 문체를 구사하는 프랑스 최고의 산문가 중 한 사람'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시오랑은 모국어로 글을 썼다면 행하지 않았을 번거로운 퇴고에 그 공을 돌렸다. 문장을 써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정제되어 얻어낸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살았던 삶이 프랑스인들 마저 사랑해마지 않는 아름다운 시적 문체를 탄생시킨 셈이다. 이는 곧 생의 대부분을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생을 여실히 반영한 절망의 팡세에는 고독과 편견, 상실에 대한 염세적 세계관이 도드라져 보인다. 스스로에게 조차 철저하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던 시오랑에게 삶의 본질이란, 늘상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란 결국 허무이고, 의미 없음이며, 죽음인 것이다.

 

 

 

"나는 내 삶을 죽은 사람들의 묘지 위에 세우고 싶지 않다."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를 읽자면, 문득 청색시대의 피카소 작품들이 떠오른다. 스페인 출신의 그에게 파리라는 대도시는 화려하고 찬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가난과 절망, 죽음의 목격은 그로 하여금 캔버스 위에 희망의 청색 대신 절망과 죽음의 청색을 뒤덮게 만들었다. 이는 곧, 소외된 채 절망에 빠진 이들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했던 것으로, 절망을 바라보는 시오랑의 시선과도 상통하는 바다. 다시 말해,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눈앞의 확실한 절망을 바라봤던 것이다.

 

일례로 청색시대 작품 속 인물을 감상하듯, 액자 밖 관람자가 되어 절망에 빠진 자신을 바라보자. 짙은 어둠속, 코끝에 스미는 음울한 냄새를 맡으며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우울감과 피로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절망을 마주하는 일은 극도의 고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를 읽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절망에 빠진 우리의 삶에 묘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도리어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용기,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생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는 우리의 생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돼 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오늘의 우리에게 경탄할 만한 자극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깊은 절망감에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찰나,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나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마치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감각들이 깨어나는 듯한 순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기 위해 일생을 무던히 씨름해야만 하는 희망에 대한, 실망과 좌절의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반대급부의 어떤 것은 아닐는지. 삶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달콤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정도만큼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가 우리의 가슴을 전율시킬 것이다.

 

 

 

내 뒤에 태어날 사람들을 위해 나는 여기서 선언한다. 이 지상에서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구원은 망각 속에 있다고. 모든 것을 잊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나 자신도 잊고, 세상을 잊고 싶다. 진정한 고백이란 눈물로만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내 눈물은 세상을 잠기게 할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불은 세상을 태워버릴 것이다. 기댈 곳도 필요 없고, 격려도 동정도 필요 없다. 내가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나 자신은 강인하고 냉정하고 사납다고 느낀다. 나는 희망 없이 살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강렬한 영웅적 용기, 그 절정과 역설이 거기에 있다. 미친 짓이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위해서, 깨달음과 의식으로 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나는 내 안에 살고 있는 불분명하고 혼돈스런 열정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내가 희망을 가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 망각을 희망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절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즉 그 "희망"은 모든 염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알고 싶지 않다. 그 많은 문제, 토론, 격앙은 무엇 때문인가? 죽음의 의식은 무엇 때문인가? 철학과 사고를 멈추라!    - p.87, 88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10점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챕터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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