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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알랭 드 보통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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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낭만 이후, 일상의 사랑을 지키는 용기와 행복에 대하여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 p.18

 

이성에 대한 호감과 그로부터 발하는 사랑의 시작은 매우 주관적이고 정서적이며 내면의 감수성 추구에서 비롯하는 감정이기에, 때때로 우리를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낭만에 젖어들게 한다. 이 같은 감미로운 심리 상태와 관계의 지속이 영원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차츰 서로에게 권태로움을 느끼곤 하는 것이 수많은 연인 혹은 부부들이 겪는 사랑이란 이름의 딜레마다. 그런 의미에서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지속가능한 사랑을 위한 새로운 방식의 연애 지침서가 돼 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하기 충분하다. 사랑을 열정이라기보다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그가 소설 속 연인이자 부부 관계인 라비·커스틴을 통해, 낭만적 사랑 이후의 현실적인 일상의 사랑을 조명하는 이유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 - 실은 사랑의 시작 - 이후에 요구되는 한층 성숙되어야 할 우리의 마음가짐,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난 미친 여자와 결혼했어."    - p.76

 

사랑의 결실이었던 결혼 생활은 차츰 상대방에게 별것 아닌 일들로 화내고 짜증 내며 토라지기 일쑤인 것으로 변모한다. 또한 모든 문제의 시작은 자신이 아닌 상대방 탓에 유발되는 것이라 여기며, 급기야는 '이걸 어떻게 평생 견디고 살지?', 한탄하는 동시에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상대를 향해 '난 미친 여자와 결혼했어.'라는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이 무색하게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광대한 자연 안에서 다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조차 흐릿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서로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가고 이해하려는 각별한 노력을 보였다는 데에 있다. 더불어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에 때때로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성숙한 사랑의 관계로 순조롭게 접어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은 누가 날 돌봐주고 보호해줬으면 좋겠다고. 정말 화가 치민다."    - p.194

 

이제 첫 아이가 태어난다. 이 연약하면서도 천진난만한 존재는 무조건적인 베풂의 대상이자,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존재다. 그러나 아이가 점차 커가면서 다정함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지금까지의 양육 방식에 제동이 걸린다. 아이를 향한 상대방의 지나친 감상적 태도에 불만과 우려를 표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과도한 요구에 아이를 향한 시선에 가여움이 스미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일과 병행되어야 할 가사부담과 양육의 문제에선 서로가 더 많은 수고스러움을 감당하고 있다고 여기며 불만을 가지는 한편, 둘 만의 오붓한 시간을 바라던 욕구 이면에선 자신이 현재 그럴 기분인지에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아내는…… 좋은 사람이에요."    - p.206

 

그러던 어느날, 아주 우연한 장소에서 마주한 젊고 매력적인 상대를 통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자신 안의 어떤 자아가 다시 생성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배우자를 존중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그저 너무나도 강하고 유능해 보여서 더는 자신이 필요 없다 여겨지던 마음속 어딘가의 상처와 치밀었던 분노와도 무관하지 않다. 반면 외도를 통해 결혼 생활의 목적에 변화가 생겼음을 비로소 깨닫기도 한다. 이를 테면, 애정에 치우쳤던 젊은 날에 비해, 하나의 제도 안에서 견고하게 쌓아왔던 지난날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조금 더 필요해요"   - p.289

 

둘은 관계의 미숙함을 깨닫고 이를 타파해 나가고자 심리 치료사를 찾기도 한다. 그곳에서 라비는 불안해하면서 공격을 일삼는 불안 애착이, 커스틴은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회피 애착이 형성돼 있음을 알게 되고, 그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상대방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음을 깨닫는다. 그러고는 결혼 16년 만에 비로소 자신이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 그것은 무엇보다 완벽함을 포기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시에 타인에게 완전히 이해되기를 단념하고, 자신이 미쳤음을 자각했으며, 상대방이 까다로운 것이 아님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기보다 베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고, 항상 섹스는 사랑과 불편하게 동거하리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며,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와 소설에 묘사된 사랑이 그가 삶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랑과는 거의 일치하지 않음을 알아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침내 여태껏 함께해 온 사람들과 그들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는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 01. 낭만주의 

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 - 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 -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 p.16

라비는 내면과 외면의 특질들이 가장 특이하게 조합된 - 지성과 친절함, 유머와 아름다움, 담력과 순수함을 지닌 - 사람을 발견했다고 확신한다. 두 시간 전만 해도 생면부지였건만 이 식당을 떠나면 보고 싶어질 것만 같은 사람, 지금 이쑤시개를 들고 테이블보 위에 희미한 선을 그리고 있는 저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손가락을 끼어 꼭 쥐어보고 싶게 하는 사람,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다.    - p.22, 23

혼자서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산만한 파티를 끝내고 혼자 걸어오는 귀갓길, 다른 사람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 흘러가는 일요일, 아이들 때문에 녹초가 되어 대화를 나눌 기운조차 없는 부부들 뒤를 따라다니는 휴가, 누구의 가슴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쓸쓸한 깨달음은 이제 족했다. 그는 커스틴을 깊이 사랑하지만, 그 못지않게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싫기도 하다.    - p.60

결혼 :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 p.65

 

# 02. 그 후로 오래오래

사실 라비나 커스틴의 마음속에 그들 사이에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절대 진리는 없다. 그들 삶의 분위기는 끊임없이 회전한다. 단 한 번의 주말에도 갇힌 기분에서 감탄으로, 욕망에서 권태로, 무관심에서 환희로, 짜증에서 애정으로 급변한다. 제삼자에게 공정한 판정을 받기 위해 쳇바퀴를 어느 한 지점에 고정하면, 돌이켜봤을 때 한순간의 심리 상태를 반영했을지 모를 고백에 영원히 붙박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우울한 선언은 언제나 더 행복한 선언으로는 능가할 수 없는 권위를 휘두르게 된다.    - p. 80, 81

우리가 파트너로부터 두렵거나 충격적이거나 구역질 나는 말을 거의 듣지 않을 때가 바로 걱정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다. 친절해서든 사랑을 잃을까 애절하게 두려워서든 그런 말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파트너가 달콤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상상을 은폐하고 있다는 가장 뚜렷한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희망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보에 귀를 닫아버렸고 그럼으로써 그 희망이 더욱 위태로워지리라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 p.106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    - p.116

신뢰하고 협력하는 분위기에서는 두 프로젝트 - 가르치기와 배우기, 상대방의 결점을 환기하고 상대방의 비판을 허용하기 - 가 결국 사랑의 참된 목적에 충실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p.138

 

# 03. 아이들

아이들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은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 아이들은 그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줄 위치에 있기 때문에 - 어떤 보답도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장점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약점에 대한 동정, 즉 인류 모든 구성원에게 공통으로 존재하고 한때 나 자신의 것이었고 결국 나 자신의 것으로 되돌아오는 그 취약성을 동정하는 사랑으로 인도된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와중에 이 무기력한 피조물은 아무도 결국은 '자력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인생은 - 문자 그대로 - 사랑하는 능력에 의지한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 p.147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멋진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린애 같은 면에 조금 더 다정함을 보이는 세상에서 산다면 더욱 멋질 것이다.    - p.163

불안은 안녕을 뜻하는 별난 징후일 수도 있다. 불안은 우리가 상대방을 당연시하지 않는다는 것, 일이 정말로 나쁘게 돌아갈 수 있음을 잘 알 정도로 우리가 여전히 현실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신경을 쓸 만큼 충분히 애정을 쏟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81

 

# 04. 외도

우리의 낭만적인 삶은 슬프고 불완전하게 끝날 운명이다. 우리가 강력히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두 가지 근본적인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곤란하게도 우리는 유토피아적으로 이 분열에 수긍하기를 거부하고, 대가 없이 어떻게든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순진하게 소망한다. 자유사상가가 모험을 추구하며 사는 동시에 외로움과 혼란을 피할 수 있고, 결혼한 낭만주의자들이 섹스와 애정, 열정과 일상을 통합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 p.234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 p.236

결혼 :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 p.237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는 깔끔한 해결 방안은 어디에도 없다. 모험과 안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았다.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과 아이들은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고, 외도는 결혼 생활을 죽인다.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자유사상가인 동시에 결혼한 낭만주의자가 될 순 없다.    - p.238

외도의 여파로 라비는 결혼 생활의 목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젊었을 때 그는 결혼 생활을 감정(애정,욕구,열정,갈망 등)에 대한 축성(祝聖)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못지않게 하나의 제도로서도 중요하게 인식한다. 관계자들의 감정에 잠깐씩 일어나는 그 모든 변화에 낱낱이 주목하지 않고 한 해 한 해 굳건히 버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제도로서 말이다. 결혼 생활의 정당성은 감정보다 더 견고하고 지속적인 현상들, 즉 나중에 수정 불가한 최초의 약속 행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창조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만족에 대한 무관심을 타고난 자식들이라는 존재에 있다.    - p.242

 

# 05. 낭만주의를 넘어서

이 세상에 항상 나쁘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스스로도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응은 냉소나 공격이 아니라, 드문 순간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사랑해주는 것뿐이다.    - p.270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성은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 p.283, 284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짦은 순간 - 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 - 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 p.293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을 읽다보면, 결혼 생활의 실체를 고발하기라도 하는 듯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결혼'에 대한 정의가 두 차례 등장한다. 서로를 잘 모르는 - 하지만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는 - 두 사람이 벌이는 자칫 무모해 보이는 결혼이란 도박이 성공하기 위해선 양자 간의 부단한 이해와 노력이 절실함을 깨닫게 한다.

 

낭만적 연애 이후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들을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를 통해 만나보시길!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김한영 옮김/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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