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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7

기형도 전집 | 기형도 전집 편집위원회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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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詩作 메모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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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그토록 치명적이고 불길한 매혹, 혹은 질병의 이름

 

 

 

몹시도 무료했던 어느 오후의 묘한 이끌림을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한다. 벽 한 면의 책장을 빼곡하게 채우고도 틈마다 비좁게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한 시집에 대한 얘기다. 시집 제목은 『잎 속의 검은 잎』. 페이지를 넘길수록 '기형도'라는 낯선 시인에게서 풍겨져 오는 생경함의 세계가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내 마음을 장악해왔다. 음울함이었다.

 

이후로도 간간히 기형도의 시집을 펼치곤 했다. 어떤 날에는 「오래 된 서적」을 읽고 또 읽었고, 「흔해빠진 독서」를 연거푸 읽는 날도 있었다. 또 어떤 날에는 「10월」의 어느 한 연을, 다른 날에는 「거리에서」의 한 연을 거듭 읽는 식이었다. 「밤눈」을 읽으면서는 한참을 그 '사납고 고요한 밤'에 대하여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 밤의 ― 자꾸만 어디론가 흩날리는, 아니 흩날려야만 하는 ― 눈과 같은 존재라 여겼으므로. 그런데 이 시집에 실린 61편의 시들에 버금가게 반복적으로 읽었던 것이 시집 처음과 마지막에 실린 '시작(詩作) 메모'였다. 처음 한 두 번은 의례히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이런 시들을 써 내렸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시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내 마음 한 켠을 경건하게 했던 이유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차라리 ― 시인의 시를 대하기에 앞선 ― 모종의 의식에 가까웠다. 그것을 원문 그대로 『기형도 전집』에서 만나볼 수 있었는데, 다시금 「밤눈」이 수 놓아진 페이지를 몇 번이고 펼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시들 중에서 5주기 추모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실렸던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는 그 어떤 시 보다도 기형도스러워서 마음이 동했다. '그리하여 겨울이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그날의 오후 3시,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걸어가는 너와 나, 우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단편소설과 산문 역시 그의 시적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쉬이 읽어 내릴 수 있는 글들이어서 차분하게 음미할 수 있었다.

 

참고로 『기형도 전집』은 1999년 작고 10주기를 맞아 출간된 것을 이번에 교보에서 새로운 표지로 재출간한 특별 한정판이다.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잎 속의 검은 잎』과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5주기 추모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실렸던 시와 소설, 산문, 자료를 비롯하여 미발표 시 20편과 단편소설 「겨울의 끝」을 새로이 포함하고 있다.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 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神)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 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一生)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 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 p.318 「짧은 여행의 기록」

 

 

 

 

 

기형도 전집 - 10점
기형도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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