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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8

저물 듯 저물지 않는 | 에쿠니 가오리 | 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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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낮도 밤도 아직은 가거나 오지 않았다
느긋하게 울렁이는 어스름한 녘이다

 

 

 

쉰이라는 나이에 책 읽는 것 외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주인공 미노루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그린 『저물 듯 저물지 않는』에는 별다른 이야깃거리랄 것이 없다. 그저 흘러가고 있는 보통의 나날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그 점이 외려 에쿠니 가오리만의 산뜻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 안에서, '소설 속 소설'이라는 독특한 형식 안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인상이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은 일상 안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생각 혹은 감정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곤 하는데, 그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솔직한 면면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령, 미노루와의 부부 비슷한 생활 안에서 누렸던 자유를 호언했으면서도 '진짜 부부', '진짜 가족'을 원해 그의 곁을 떠났던 나기사의 ― 부부에 대한, 인연에 대한 ― 담담한 고백이 그렇다.

 

 

부부란 것은 참 그로테스크하다. 결혼한 후로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나기사는 지금 또 한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몰라도, 아니 상대가 귀찮게 여겨질 때조차, 밤이 되면 같이 자고, 아침이 밝으면 같은 식탁에 앉는다. 조그만 불쾌함도 말의 어긋남도,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일상 속에 묻히고, 밤과 낮이 되풀이되고, 부부가 아니면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세상에서는 그런 걸 인연이라고 하리라. 그러니 인연이라는 것은 나날의 조그만 불쾌함의 축적이다.    - p.368

 

 

 

나기사가 베란다에서 남편, 아이와 함께 폭죽을 터뜨리며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훗날이 되어서야 그때는 행복했다고 깨닫는, 가족이 보내는 일상의 한 장면(p.183)'일 거라고 떠올리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 말고도, 스즈메 고모와 엄마(나기사) 사이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에게도 귀가 있다는 걸 잊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하토의 장면이라든지, 쉰 살이라면 무릇 안정적인 무언가가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오타케와 미노루의 푸념 섞인 장면 등, 흐름 안에서 문득문득 마주하며 동감하고 공감도 하는 식이다. 그 소소한 재미가 소설보다 진짜 소설같은, ― 미노루가 깊게 빠져있던 두 권의 ― 소설 속 소설의 박진감 넘치는 미스터리를 능가한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나는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이라는 소설 제목에 눈길이 갔었다. '미노루가 사는 시간은 낮과 밤의 경계인 해 질 녘처럼 어스름하고 모호하고, 때로는 혼란스럽기도' 하다고 적고 있는 '옮긴이의 말'이 있기는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 어스름한 빛으로 충만한 해 질 녘에 대하여, 그럼에도 좀처럼 저물지 않는 그 시간들에 대하여, ― 미스터리 소설책을 읽으며 독신 생활을 즐기는 미노루가, 독일과 일본을 오가며 자유롭게 지내는 스즈메 역시, 비록 아내는 떠났지만 쉽사리 손가락에 낀 결혼 반지를 빼지 못하는 오타루가, 결혼 생활을 즐기면서도 때때로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나기사의 ― 일상이 지속되는 한 각자 안에 떠있는 해는 쉽사리 저물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

 

 

미노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건 소설이고, 조니도 라우라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지. 세상 어딘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과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일까.    - p.286

 

 

 

 

 

저물 듯 저물지 않는 - 8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소담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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