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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8

반딧불이 | 무라카미 하루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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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반딧불이 같은 청춘의 빛
그 아름다운 스무 살의 날들을 이야기하는 하루키 문학의 원류

 

 

 

# 01. 「반딧불이

 

적막한 어둠 한가운데 작은 빛이 감돈다. 반딧불이가 머물다 간 자리다. 그곳을 지긋이 바라보며, 그게 삶의 신비라는 것을 순간 확신했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쉬이 지지 않을 수 있는 건, 모두 그 덕택이라고. 그렇기에 그 작은 빛을 최대한 꺼뜨리지 마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최소한의 소임일 거라고. 그러나 작은 빛은 언젠가 힘을 잃게 돼 있다. 결국 어둠 속에 스미고 말 것이므로. 그러나 그것 역시 삶의 일부임을 안다. 「반딧불이」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청춘의 한낮 속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상기하게 한다.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감은 눈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그 약하디약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 p.47

 

 

 

# 02. 「헛간을 태우다

 

남자는 가끔씩 헛간을 태운다고 했다. 그가 태우고자 붙이는 불씨는 무얼 향한 내던짐이었을까를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판단하기에 앞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남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므로. 그러므로 이따금 ‘나’와 함께 그저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상상해볼 뿐이다.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십오 분이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 있지요. 마치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요.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라질 뿐이죠. 깨끗이요.”    - p.68

 

 

 

# 03.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실체 없는 무언가에 좀먹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것에 잠식 당할 것을 두려워하곤 한다. 내 안에서 떠도는 우울과 불안, 강박이 일순간 부딪힐 때다. 어둠을 양분 삼아 아래로 뻗어가는 장님 버드나무가 더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해야지, 그리고 나는 결코 잠들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질 거라는 말을 믿고 있다.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나는 내 안에 아픔에 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아팠던 기억은 몇 가지 있다. (…) 그러나 아픔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 p.98, 99

 

 

 

# 04. 춤추는 난쟁이

 

왜 하필 나야, 싶을 때가 이따금 있다. 그 한숨 섞인 불평 속에, 애초 빌미를 제공한 내 탓도 있겠다, 하는 자책을 포함할 때도 더러는 있다. ‘나’의 물음에 대답 대신 웃기만 했던 난쟁이를 나 역시 어디선가 마주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아무래도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어찌 됐든 네 탓도 있으니, 너무 억울해 말라는 듯한 춤추는 난쟁이의 웃음… 그 살짝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잔혹하게 다가오는 건지도.

 

“왜 하필 나야?” 나는 난쟁이를 향해 소리쳤다. “왜 다른 누군가가 아니고 나냐고!”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 p.169

 

 

 

# 05. 세 가지의 독일 환상

 

‘내’가 생각하는 안전한 곳은 헤어W에겐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오직 크로이츠베르크에서만이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다소 비루해 보이는 공중정원의 겉모습 역시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그것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헤어 W의 공중정원과 같은 곳이 통일 이전의 독일 크로이츠베르크에 있었던 것처럼,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나라 어딘가에도 누군가의 정성 속에 가꿔진 환성의 공간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얼토당토않은 상상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어째서 좀더 안전한 곳으로 정원을 옮기지 않습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 “말도 안 되죠.” 헤어W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난 여기가 좋아요. 친구들도 모두 이 크로이츠베르크에 살고 있고요. 여기가 제일 좋아요.”    - p.191

 

 

 

# 06. 비 오는 날의 여자 #241 ∙ #242

 

어느 날 문득 찾아왔다가 사라져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그날 ‘나’의 집 초인종을 눌렀던 비 오는 날의 여자처럼. ‘나’는 핑크색 투피스 정장에 연갈색 장화를 신고, 손에는 초록색 비닐우산과 검은색 아타셰케이스 케이스를 든 그 여자가 다시 한번 오기를 기다리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고요한 단색조 바탕에 함부로 끼얹은 요란한 원색 같았던 그녀의 난데없는 등장은 모든 게 익숙했던 ‘나’의 공간을 한없이 낯설게 만들어 버렸다. 누구의 탓일까. 비 오는 날에 떠올리기 좋은 얘기다. 마침 온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지금 이곳은 몹시 이상한 방처럼 느껴졌다. 마치 지구가 파멸한 뒤 유일하게 남은 장소 같았다. 비 오는 날의 여자 탓이다. 부풀어오른 심장과, 주위 소리를 빨아들여버리는 탐스러운 봄꽃 탓이다. 이 세계에서 아마 영원히 상실되었을 그 초록색 우산 탓이다.    - p.210

 

 

 

 

 

반딧불이 - 10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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