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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8

안녕 주정뱅이 | 권여선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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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절망과 구원을 동시에 노래한 시 같은 소설

 

 

 

행과 불행이 혼재된 일상 안에서 술은 때때로 삶을 좀먹기도 하지만, 내일을 살게도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방식, 이런저런 이유들로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술을 마신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 술을 마신다는 행위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살아감의 장면들을 통해 일상 속 우리의 삶을 반추한다.

 

 

 

# 01. 봄밤

 

자신은 온통 분모 뿐인 사람이라고 여기는 수환은 영경에게 조금이나마 나은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고 싶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하면서도 독한 주사까지 맞으며 멀쩡한 척, 영경의 외출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외출의 목적이 술을 마시기 위함이고 그것은 그녀의 몸을 더 망치고 말 것임을 알지만, 그것만이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나마 늘릴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역시 그 편이 더 황홀한 구원 일지도 모른다, 그런 수환과 영경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끔찍한 삶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죽음마저도 그 일부로서 기꺼운 마음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을 통해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 그러니까 1(기준점)보다 큰 사람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사는 ― 언뜻 미미해 보이지만, 더없이 간절한 ― 우리들에 대한 상기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수환이 말했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 p.25

 

 

 

# 02. 삼인행

 

주란과 규, 훈은 서울을 등지고 도착한 밤, 숙소에서 술을 마시면서 사소한 일로 말씨름을 벌인다. 그러나 날이 밝은 규와 훈에게 지난 밤 일은 사라져 있다. 주란 역시 한 달째 지지부진한 건강보험료 문제로 관계자와의 통화에 몰두할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지겹다며, 독재니, 본심이니 큰 소리 내던 앙금은 그 밤, 알코올과 함께 증발해 버린 걸까. 셋은 돌아가는 길, 식당에 들러 해장술을 시작한다. 다시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는 규의 말처럼, 그들이 그곳에 영영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다. 그들 관계에서 술은 약인 걸까, 독인 걸까. 어쩌면 이들 셋을 넘어 지리멸렬한 삶 속의 우리를 내포한 술에 대한 상념일 수도 있겠다.

 

눈은 내리고, 술은 들어가고,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말야. 규가 초조하게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우리는 다시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 그들은 말없이 소주잔을 비우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굵어진 눈발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옅은 취기로도 그들은 위태했다.    - p.72, 73

 

 

 

# 03. 이모

 

쉰다섯이 되도록 결혼도 않고 집안의 가장이자 맏딸로서 가족을 부양하던 여인이 어느 날 홀연 떠났다. 계속된 영혼의 짓눌림이 결국 불공평하고 부정직함에도 피붙이이기에 감당했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서로가 서로에게 잔혹한 사람일 수 있는, 성가시고 귀찮다는 이유로 피우던 담배를 손바닥에 눌러 꺼도 쉬이 아물 수 있는 남이었으면 좋으련만. ‘나’에게 내 피붙이가 아니라서 더 좋다는 그녀가, 그녀 안에 내재된 증오가, 결국 자유로운 삶의 의지를 되살렸지만, 중한 병에 들게도 했다. 삶의 아이러니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지는, 않았겠지. 불가촉천민처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하게. 내 탓도 아니고, 세상 탓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성가시고 귀찮다고, 누굴 죽이지 않은 게, 어디냐? 그냥 좀, 지진 거야. 손바닥이라, 금세 아물었지. 그게 나를, 살게 한 거고."    - p.106

 

 

 

# 04. 카메라

 

사진을 배워서 찍고 싶어, 라 했던 문정의 말이 관주의 죽음에 얼마만큼의 원인을 제공한 걸까. 관주로 하여금 카메라를 사게 한 결정적인 한마디였음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정은 그의 죽음에 조금의 의도도,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날따라 사진을 배워 찍어 볼까 싶었던 거고, 관주 역시 그날따라 프레임의 빛과 그림자에 매혹돼 셔터를 눌렀을 뿐이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불법체류자와 시비가 붙었고, 또 하필 그 일은 돌길에서 벌어졌다. 너무도 많은 우연들이 겹치며 만들어 낸 하나의 필연이 누군가의 죽음이고, 또 누군가의 슬픔이며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야속할 따름이다. 관희 역시 그걸 알기에 문기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을뿐더러, 문정을 알은체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결국 돌고 돌아 문정의 손에 들어온 카메라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말짱한 모습이었고, 메모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카메라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한 관희는 물론, 관주와 문정 역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뭐가 됐든 나쁜 일을 저지른 대상은 우리에게 필요하므로.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 p.136

 

 

 

# 05. 역광

 

입주 명단에도, 공용 발코니에도 위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만났던, 함께 술 마시며 대화했던 그 남자는 어디서 왔다가 언제 가버린 걸까. 신인 소설가로 예술인 숙소에 입주해 있는 그녀는 곧잘 커피잔에 소주를 부어 마시고, 악몽을 반복해 꾼다. 아무래도 내면 깊숙이에 지독한 불안이라도 자리한 모양새다. 그 불안증이 만들어낸 위현이란 인물은 허상이 분명하지만,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미심쩍다. 삶에는 때때로 역광만이 드러낼 수 있는 실재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점점 비인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아무도 나를 주체로 여기지 않아요. 그걸 받아들이는 게 아직도 때로는 분하고 힘이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여전히 명랑한 주체인 양 거울을 보고 명령합니다. 내 안의 장님이여, 시체여, 진군하라!."    - p.172

 

 

 

# 06. 실내와 한켤레

 

둘이서만 어디론가 향하는 혜란과 선미를 흘끗 보다, 자기 발 밑에 놓인 실내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경안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 말 못 할 소외감은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까지 그날에 그녀들이 쓰고 떠났던 주황색 바탕에 흰 물방울무늬 우산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저장돼 있다. 이후 자연스레 멀어졌다가 경안의 방송 출연을 계기로 셋은 재회한다. 그러나 14년의 시간만이 달라졌을 뿐, 그녀들과의 만남 뒤에 남은 께름칙한 뒷맛은 여전하다. 어딘지 비밀스러웠던 선미의 의뭉스러움을 무어라 이해해야 할지. 미움과 시기, 질투 어쩌면 그것들을 넘어서는 증오였을까.

 

그 만남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 p.176

 

 

 

# 07.

 

하고많은 순간들 중 하필이면…, 싶을 때가 왕왕 있다. 물론 그 우연이란 것이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길 정도의 것이라면 다행인데,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데 있다. 예연이 그날 그 장소에서 인태가 내뱉는 상소리를 엿들은 것이 그랬다. 그에게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반듯한 줄 알았던 이에 대한 그녀의 당혹스러움은 족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결국 그 찰나의 뒤틀림은 관계를 무너뜨렸다. 누구의 탓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누구의 탓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 같아 씁쓸하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것을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인생이고, 삶인 걸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 p.230
모든 게 내 탓은 아니라고,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 p.240

 

 

 

 

 

안녕 주정뱅이 - 8점
권여선 지음/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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