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별별책/2018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 컬처그라퍼

반응형

 

[이미지 출처 - 알라딘]

 

 

 

 

모든 게 끝났으니 진짜 여행은 이제부터

 

 

 

올여름은 비행기 티켓 창을 열어두고 한참을 골몰하다가 허무하게 닫기를 수 차례 반복하는 동안 저만치 물러간 느낌이다. 그런 나날의 분주하고도 집요하게 움직이던 나의 검지 손가락은 더위를 핑계 삼아 잠시 어디론가 떠나려는 속셈이 다분했다. 그런데 숨 막히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그럭저럭 한 바람이 스치면서 더 이상 같은 이유로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기에는 멋쩍은 상황이 오고 말았다. 그렇게 흐지부지된 상황에서 집어 든 『언젠가, 아마도』.

 

김연수 작가가 4년에 걸쳐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연재한 글에 새로운 글 8편을 추가해 엮은 여행 산문집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지의 각종 정보와 그곳에서의 체험담을 생생하게 적고 있는 여행기를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다. 여행지의 한가운데서 보고 듣고 느끼며 마음 한 켠에 쌓아 두었던 단상들을 후일 꺼내어 보태고 다듬어 완성한 글에 가까운 이유다. 더욱이 작가의 유년과 학창 시절, 그리고 오늘을 넘나들며 풀어놓는 일화들과 맞물려 여행의 범주를 훌쩍 벗어난 인상마저 풍긴다. 그래서일까. 이번 여행 산문집은 낯설고 외로워서 한결 쓸쓸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가령 적막한 호스텔 안에서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안도하고, 홀로 때워야 하는 끼니와 역시 혼자 들어선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에는 어색함과 불편함이 묻어 난다. 사실 ‘여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자면 모름지기 그로 인해 만끽하게 되는 설렘과 즐거움을 앞서 상상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기에 실린 글들은 마치 여행의 민낯을 들여다보게 하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여행지에서 들이켜는 청량한 맥주의 맛, 뜻밖의 우연과 조우 그리고 깨달음은 여행만이 선사하는 특별함인 것이다. 단지 전자의 인상이 보다 강렬한 것은 아스라한 기억의 뒤를 밟고 있는 듯한 글의 분위기가 주는 필연일 수도 있겠다.

 

돌연 여행지의 낯선 길 위 모든 것이 어쩐지 낯설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해봤다. 고독과 환희가 혼재된 삶 속에서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여행에서 거닐었던 그 길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지나온 여행들에서 알게 모르게 체득해온 이유가 아닐는지. 결국 여행도 삶의 일부니까. 그렇기에 여행에서 훌쩍 삶으로 이야기의 범주가 확대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이국의 낯선 풍경을 배경으로 한결 즐겁고 유쾌한 그리고 자유로운 자신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구태여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자 끝없이 갈망하는 것일 뿐.

 

무더운 밤,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지만 떠나지 못하고 읽은 책이어서, 올 여름을 생각하면 단박에 이 산문집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는 기다림의 희망을 사기 위해 비행기 티켓 창에서 표류하던 내 모습도.

 

 

 

지난 몇 년 동안, 이따금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들을 이 책을 통해 풀어놓았다. 그렇게 떠오른 기억 속의 나는 일상 속의 나보다는 조금 더 고독하고 조금 더 활동적이고 조금 더 유쾌했다. 그런 나의 모습 뒤로는 늘 이국의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달라지면 내가 달리진다는 건 확실했다. 그게 바로 여행의 목적이었다. 이제 모든 여행은 끝났다. 이제는 바로 여기, 지금 이 세상에서도 나를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나 자신을 바꿀 수 있을까? 진짜 여행이 이제부터 시작된다.    - p.257

 

 

 

 

 

언젠가, 아마도 - 8점
김연수 지음/컬처그라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