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일곱 살, 한 사람의 기록
올해로 아흔일곱 살인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서른 해가 넘도록 써온 일기를 추려 펴낸 책이다. ‘책을 내면서’에서 밝히듯, 할머니는 ‘남편이 저 세상 가고 나 혼자 살다 보니 적적해서 글씨나 좀 나아질까 하고 도라지 까서 판 돈으로 공책을 사서 쓰기 시작한 것이 손주가 그것을 일기라고 소문을 내서 이렇게까지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 ‘고맙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p.212)’하다는 할머니의 일기장이 전하는 온기가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 한편 코끝을 찡하게 한다. 그것은 흙 한 줌, 곡식 한 알도 허투루 보지 않으며, 지저귀는 새소리에 애달파하기도, 한겨울의 산짐승에 마음을 쓰기도 하는 할머니의 정겹고 따뜻한 마음씨 때문이리라. 더욱이 소박한 일상 속에서도 도시로 나간 자식들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그리워하며, 때로는 그런 제 마음을 못다 헤아려주는 자식들에게 서운해하기도 하는 속내가 가슴 한 켠을 아릿하게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게 됐다. 이런저런 내 낡은 기억들 속에 살아 계신 할머니는 옅은 미소를 띄우며 손을 흔들고 계신다. 나는 멀어져 가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한참을 손을 흔들다가 돌아서 앉으며 남겨진 할머니의 외로움을 어림잡아 보곤 했다. 초등학교 때 얘기니 까마득한 옛 일처럼 멀게만 느껴지면서도 그때에 느꼈던 감정만은 순간 하도 또렷하게 상기돼서 신기할 정도였다. 이옥남 할머니가 자식들의 방문에 한껏 마음이 동했다 가도 떠나보내며 들었던 쓸쓸한 심정의 토로가 그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우리 할머니의 일기는 아니지만, 꼭 그 마음을 들여다 본 것 같아 애틋함이 남는다. 소박한 삶 안에서 보여준 순박한 할머니의 모습을 언제까지고 간직하고 싶다.
2012년 5월 1일, 애들이 왔다 가고는
솥에 나물 삶아 널어서 말리고 그래다보니 하루해가 다 가고 말았다. 애들이 왔다 가고는 집이 텅 비는 것 같아서 그저 서운한 맘 간절하다. 저녁이 되니 더욱 집이 슬슬한 것 같구나. 그러나 할 수 없지. 그만 자리에 누워나 보자. – p.55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 이옥남 지음/양철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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