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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9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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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계절의 흐름 안에서 묻는 안부가 사려 깊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p.11) 말하는 소박한 바람과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p.49)다는 에두른 인사가 너른 마음 씀씀이를 가늠케 한다. ‘가을에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고 믿는’(p.64) ‘나’는 섣달의 어느 날,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p.83) 생각에 며칠간 뜸했던 부엌으로 향하며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 조심스러운 한마디, 과장하지 않는 몸짓 하나하나는 사소한 듯 하나 더없이 살뜰하기만 하다.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든 마음, 조금 보태어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지는 기분이 든다.

 

그 대상을 찾아 서성이게 하는 신비한 힘을 지닌 시들은 그래서 내게 조용한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오늘의 나와 당신이 서로를 소중하게 배려하는 기꺼운 마음 안에서.

 

 

 

 


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8점
박준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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