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별책/2025

나의 폴라 일지 | 김금희 | 한겨레출판

별별조각 2025. 2. 1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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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생명의 가장 깨끗하고 단순한 출발 앞에 선
다감한 소설가의 투명한 기록

 

 

 

남극 세종 기지에는 연구 목적으로 발 디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곳에서 한 달간 체류하면서, 무얼 기록할 수 있을까. “잠시 ‘관광’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오래 머무르며 인간종(種)으로서 작고 단순하고 겸손해지는 과정을 겪어보기를 원했다.”(p.14)는 도입부의 말을 내내 떠올리며 그녀의 일지에 의지해 남극 앞에 선 한 존재의 시선을 좇았다. 거기에는 웅장한 대자연이 있었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 질서가 보여주는 경이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펭귄이 있고 물개가 있고 고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남극의 아름다운 이색 풍광에 자연스레 여행자의 시선이 되고 마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느 종(種)과 마찬가지로 이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는 저마다 제 자리에서 생존을 위한 분투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제는 제 살 길뿐 아니라 공생을 위한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순간이기도 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었다. 그것은 곧 “남극 하면 우리와 먼 곳처럼 들리지만 막상 여기 와 보니 남극의 모든 것이 삶을 관장하고 있었다.”(p.200)는 깨달음과도 맥을 함께한다. 어쩌면 그러한 노력만이 이 행성의 최후의 보루가 될 남극을 가능한 한 오래, 모두가 아는 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으리라 낙관하면서. 소설가의 남극 기록은 대자연 속에서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안긴다.

 

 

 

동물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데 한 발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으면 3월이건만 아직 솜털을 달고 있는 아기 펭귄들이었다. 너희 늦둥이구나, 싶으면서 콧날이 시큰해졌다. 인간처럼 펭귄도 개중 좀 늦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고마울까. 가장 강한 것만 존속하지 않고 저마다 다른 힘과 속도를 지닌 존재들이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질서라는 사실이. 아기 펭귄들은 내가 들고 있는 등산 스틱을 톡톡 쪼았다. 뾰족한 부분이 내 부리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걔들은 나름 다정한 인사를 한 거라고. 나는 잘 있으라고, 겨울을 잘 견디라고 말하며 아쉽게 돌아섰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    - p.281 「나의 폴라 속으로」

 

 

 

 

 

나의 폴라 일지 - 8점
김금희 지음/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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