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직접 참천하고 살아남은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
침묵을 강요당했던 그녀들의 눈물과 절규로 완성된
전쟁문학의 기념비적인 걸작
내 안에서 전쟁이란 남성들의 세계였다. 그러므로 전쟁 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이 여성일지언정, 전쟁의 한복판에 여성이 온몸을 던져 적과 싸웠으리라는 생각은 애당초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를 테면,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6.25 전쟁과 해방 후 가족을 일으켰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들이었음을 자각하긴 했어도, 그 전쟁 자체는 아내와 어머니를 대신해 나갔던 남자들의 세계라고 여겼던 것이다. 수많은 남정네들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일이 부지기수였기에, 전쟁에 나간 남편 대신 어린 자식과 연로한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전쟁에 직접 참전하고 살아남은 이백여 명의 여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생생한 증언들과 마주하면서 그간 전쟁에 대해 - 그마저도 매우 막연하고 불분명하게 - 여겨왔던 시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굉장히 안일하고도 무책임했음을 비로소 자각하게 된 것이다.
"절대적인 남자들의 세계에서 당당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왜 여자들은 자신의 역사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을까?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 p.18
그렇다면, 전쟁의 한복판에서 남성 못지않은 여성들의 참여와 희생이 있었음에도 어째서 한쪽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제된 걸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역시 이 점을 통탄해한다. 오직 남성들의 목소리로만 쓰인 지금의 전쟁 역사는 온당치 못하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이 시간 이후 그동안 가려져왔던 여성들의 역사를 쓰겠다고 당당히 선언한다.
"나는 이 책을 읽을 사람도 불쌍하고 읽지 않을 사람도 불쌍하고, 그냥 모두 다 불쌍해……" - p.42
나 역시 전쟁에 직접 참천했던 여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은 이상, 지금껏 전쟁을 남성들만의 전유물인양 생각했던 것에 무척이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또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 인식될 것을 생각하자면, 비통한 마음마저 든다. 책 속에 등장한 참전 여성들은 대부분 십 대 중반을 갓 넘긴 나이에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으로 전선에 나간 이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에게 남성 중심의 전쟁터는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물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남녀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에게 열악한 시간들이었을 테지만, 여성의 체격과 발 사이즈에 맞는 군복과 군화가 있을리 만무했고, 여성으로서 한 달에 한번 씩 하는 그날에 조차 피를 보이며 행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만 봐도 그녀들이 전쟁터 안에서 감내해야 했을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오직 가족과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제 힘을 다했던 것이다.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대던 그 소리들…… 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 p.267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이 세계는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 힘쓴 그녀들의 노고를 치하하기는커녕 그 공로마저 외면하고 지워왔다……. 승리를 쟁취한 전쟁의 상처와 경험은 남성들에게 훈장과도 같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들은 그리 달갑지 못한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족에게서 조차 냉대받았던 그녀들의 아픔을 떠올리자면, 무척이나 참담한 심정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영혼을 말살당한 채, 존재하는 상처투성이의 몸뚱어리와 피폐해진 정신 말고는 그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이 책은 가능한 한 널리 읽혀 마땅한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물론 이 적나라한 전쟁의 기록을 읽어나가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코 허구가 아닌 실제이고, 피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진실이기에, 또한 침묵을 강요당했던 그녀들의 용기를 이제는 감싸 안아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기에,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실로 경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어…… 가족들도 모두 무사했지…… 엄마가 온 가족을 살리셨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살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을 살렸지. 그리고 나도 살아 돌아왔고…… 1년 후에 아빠도 돌아오셨어. 훈장을 여러 개 받아오셨더라고. 나도 훈장 하나와 메달 두 개를 받아왔지. 하지만 우리 가족의 결론은 그랬어. 우리집에서 진짜 영웅은 엄마라고. 엄마가 온 가족을 살렸으니까. 엄마가 우리 가족도 우리집도 구했어. 결국 엄마가 가장 가혹하고 끔찍한 전쟁을 치른 셈이지. 아빠는 단 한 번도 훈장을 달지 않으셨어. 훈장 약장(略章)도 달고 다니신 적이 없지. 아빠는 엄마 앞에서 훈장을 내놓고 자랑하지 않으셨어. 부끄럽다고 하셨지. 불편해하셨어. 엄마는 훈장도 메달도 없었으니까…… 내 삶에서 우리 엄마만큼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은 없어…… " - p. 535 리타 미하일로브나 오쿠넵스카야, 사병, 지뢰 매설 병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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