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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머나먼 | 최승자 | 문학과 지성사 시간, 혹은 시간이 갖는 치유의 힘에 대하여 시간은 시인을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기에 거기 몸을 맡기어… 가만히 헤아려본다.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초월해 하늘 너머로 나아갈 수도 있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시인은 시의 거처를 옮기고 있었다. 내면 깊숙이 자리한 고통과 절망은 잠시 내려두고 저 너머를 향해. 세월의 무상함 속 고요하고 쓸쓸한 시간에 기대어 바깥 세계를 응시하며 비로소 시라는, 꿈이라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원이 될 수 없었던 시가 어쩌면 자신과 세계에 드리운 잿빛 그림자를 흔들어 깨울지도 모른다는……. 황홀합니다 내가 시집을 쓰고 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 p. 85 「바가지 이야기」 중에서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 에드거 앨런 포 | 민음사 어긋나고 음습한 세계관, 이야기마다 서린 광기, 어두운 상상력으로 이성과 감성의 틈을 날카롭게 파고든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들 평범한 이야기 속에 파고든 낯선 감각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일순 평온했던 일상을 비틀며 히스테릭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서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 절망을 느끼며 자신의 영혼마저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때로는 극도로 집요하거나 과장된 이상 행동을 보이며 이성만으로는 쉬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에 놓이게도 된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옭아맨 상황 안에서 심리적 혼란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열네 편의 이야기는 마치 인간이 사는 세계란 마땅히 그런 곳임을 선언하고 있는 듯도 하여 마음속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다. 하지만..
크눌프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헤세의 분신과도 같은 고독한 방랑자 크눌프 모든 구속과 탐욕, 집착을 버린 인생에 대한 성찰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크눌프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며 인생의 방랑자가 되기를 자처한 이였다. 그런 크눌프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의 인간됨과 넘치는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끝없는 방랑과 무위도식을 이제는 그만둘 때라고”(p.22) 충고했는데. 가정을 꾸리고 직업인으로서 안정되게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우위에 둔 연유다. 하지만 안정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쉬이 희생되고 마는 것들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볼 여지가 있으리라. 크눌프가 보여준 인생길이 그 점을 상기시키기고 있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일깨우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안식월 일기 | 권남희 | 다산책방 길치에 혼밥도 못 하는 내향인이지만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기로 결심한 내일모레 육십의 도쿄 한 달 살이 도쿄에서 한 달 살기가 버킷 리스트였던 35년 차 일본어 번역가 권남희의 안식월 일기다. 언뜻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이의 세련된 도쿄 살이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마련인데, 프롤로그에서 “이것은 봄날의 도쿄에서 빙글빙글 헤맨 길치의 기록이기도 하다.”(p.11)고 맺고 있어 의아함과 동시에 묘한 동질감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역시나 그녀는 하염없이 헤매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고 지금 해야겠다.” (p.18, 19)는 결심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더욱이 그 안에서 안식월의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은 나 역..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 박준 | 난다 가장 시인 박준이 다함없는 마음으로 함께 읽자 한 67명의 시인, 그리고 68편의 시!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이내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가운데서 때때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물론 어떤 결심을 하고 용기를 얻는다는 식의 거창한 것 말고, 일상의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살아가야겠다는 작은 다짐과도 같은 마음이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는 이 시를 어떤 마음으로 마주했을지 궁금해하곤 하는데. 손수 68편의 시를 고르고 자신의 마음을 보태어 쓴 시인 박준의 세번째 산문집 『기쁨에도 슬픔에도 아랑곳없이』가 특별히 다가오는 연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그리고 금세 알 수 있었다. 시인 역시 시를 읽으며 자신이 여태 보내왔고, 한창 지내고 있는 그리고 이제 ..
바라모 | 세사르 아이라 | 민음사 독창적이고 기상천외한 글쓰기가 빚어내는 새로운 미학의 결정체 월급으로 받은 위조지폐를 진짜 지폐로 바꾸기 위해 길을 나선 파나마 콜론의 말단 공무원 바라모는 뜻밖에 시 한 편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시는 “가장 대담하면서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p.8)을 받으며 단박에 그를 최고의 시인 자리에 올려놓는다. 단 하룻밤 사이의 일이다. 종잡을 수 없는 전개로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삶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다. 근면 성실과는 무관하게 맞닥뜨리는 숱한 위기와 배반 앞에서 주춤하고 휘청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그럼에도 감내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로 하여금 삶을 아름답고 더욱 빛나게 하는 까닭이다. 바라모 역시 불가해한 우연의 연속 안에..
그랬다고 적었다 | 김애란 | 문학동네 가장 인간적인 기술로 써내려간 소소하고 놀라운 우리의 오늘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삶의 풍경들을 떠올려본다. 이런저런 얼굴로 다가와 내 안에 안착했던 마음들, 그것이 남긴 흔적들을 매만지며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앞으로 보낼 시간은 어떨지에 대하여 가늠해 보는 것이다. 떠올려보면, 대개 마음에 자국을 남기고 간 시간은 고되었고 예상했던 일은 이따금 허를 찌르며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때에 나는, 나를 잃었지만 결국 나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운데서 김애란 작가의 신작 산문들을 마주한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작가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삶의 이런저런 순간을 겪어 내고 있었..
세상의 빛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시인 리디 다타스가 모으고 되살린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 『세상의 빛』에 엮인 일곱 편의 텍스트는 시인 리디 다타스에 의해 모으고 되살려진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이다. 그래서인지 그간 만나온 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 문장의 어조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기인한다는 인상이 짙다. 깊은 사유를 통한 총망라로써 절제하고 함축하여 표현했던 문장들이 삶과 문학을 향한 그의 소신 앞에서 보다 진취적이고 구체적으로 제 안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연유다. 그 가운데서 문학과 삶을 향한 보뱅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이 일생에 거쳐 열렬히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직 선(善)이고, “마음으로 사유해야 한다”(p.112)는 진실을 깨우치게도 한다. 「뒤집힌 태양」 – 마음과 공감에 대하여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