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710)
바라모 | 세사르 아이라 | 민음사 독창적이고 기상천외한 글쓰기가 빚어내는 새로운 미학의 결정체 월급으로 받은 위조지폐를 진짜 지폐로 바꾸기 위해 길을 나선 파나마 콜론의 말단 공무원 바라모는 뜻밖에 시 한 편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시는 “가장 대담하면서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의 기원이자 정점이라는 평”(p.8)을 받으며 단박에 그를 최고의 시인 자리에 올려놓는다. 단 하룻밤 사이의 일이다. 종잡을 수 없는 전개로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삶의 진면목을 마주하게 된다. 근면 성실과는 무관하게 맞닥뜨리는 숱한 위기와 배반 앞에서 주춤하고 휘청이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지만 그럼에도 감내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로 하여금 삶을 아름답고 더욱 빛나게 하는 까닭이다. 바라모 역시 불가해한 우연의 연속 안에..
그랬다고 적었다 | 김애란 | 문학동네 가장 인간적인 기술로 써내려간 소소하고 놀라운 우리의 오늘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삶의 풍경들을 떠올려본다. 이런저런 얼굴로 다가와 내 안에 안착했던 마음들, 그것이 남긴 흔적들을 매만지며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앞으로 보낼 시간은 어떨지에 대하여 가늠해 보는 것이다. 떠올려보면, 대개 마음에 자국을 남기고 간 시간은 고되었고 예상했던 일은 이따금 허를 찌르며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때에 나는, 나를 잃었지만 결국 나로 돌아가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가운데서 김애란 작가의 신작 산문들을 마주한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작가로서 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삶의 이런저런 순간을 겪어 내고 있었..
세상의 빛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시인 리디 다타스가 모으고 되살린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 『세상의 빛』에 엮인 일곱 편의 텍스트는 시인 리디 다타스에 의해 모으고 되살려진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이다. 그래서인지 그간 만나온 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인데, 문장의 어조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기인한다는 인상이 짙다. 깊은 사유를 통한 총망라로써 절제하고 함축하여 표현했던 문장들이 삶과 문학을 향한 그의 소신 앞에서 보다 진취적이고 구체적으로 제 안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연유다. 그 가운데서 문학과 삶을 향한 보뱅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이 일생에 거쳐 열렬히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오직 선(善)이고, “마음으로 사유해야 한다”(p.112)는 진실을 깨우치게도 한다. 「뒤집힌 태양」 – 마음과 공감에 대하여 말한다. ..
영혼 없는 작가 | 다와다 요코 | 엘리 언어와 함께 가장 먼 여행을 떠난 다와다 유니버스의 시작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다와다 요코의 안개 자욱한 시선을 좇는다. 그것은 이를 테면 “언어가 큰 바다를 날아서 건너갈 수 있을까?”(p.253)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는데, 언어 단 한 가지만을 품에 안은 예측할 수 없는 여정이기에 모든 순간순간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기꺼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경계를 단박에 넘나드는 상상과 언어의 자유에서 기인하리라.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나는 “모스크바로, 모스크바로, 모스크바로……”(p,22) 부모님이 세 번 반복해 말하던 마법의 말을 기억하며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싣는다. 단순한 도시 이름일 뿐 아니라 꿈의 장소이고, 쉬이 다다를 수 없는 불가능의 성..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 민음사 문학을 통해서만 건널 수 있었던 그리움의 강 양반집 외아들로 태어난 미륵의 유년은 평화로웠다. 사촌 수암과 뛰놀며 서당에서는 한학을 배웠고, 신식 학교에 입학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고대했다. 그러나 나라의 정세가 급변하여 일본에 강제병합되는 처지에 이르렀고 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어머니의 권유로 집안의 토지가 있는 마을 송림에서 휴양하며 지내다 서울에서 다시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결심에 이른다.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월 1일 일본에 항거하는 민족적 시위에 가담한 일로 수배를 피해 낙향했다. 그럼에도 재차 달아나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화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을 거쳐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그러고는 마침내 독일에 도착하여 언어를 ..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 | 박상영 | 래빗홀 26년 만에 재가 되어 돌아온 여자 작은 상자에 담긴 뜨거운 진실 혹은 사랑의 기록 검은 욕망과 사랑이 뒤엉켰을 때 두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마치 브레이크 없는 차량에 올라탄 모양새이지 않을까. 내내 폭주하고 막바지에 다다라 크게 부딪혀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처참한 상태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행복 아닌 파멸을 위해 악착같은 삶을 자처했고, 그런 와중에 사랑을 꿈꾸며 끝내 복수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몰두하는 동안 선과 악의 경계는 점차 무의미해졌고, 그들 자신마저 해치는 비극을 감당해야 했기에 그것은 상상 아닌 지독한 현실이 되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잇는 유일한 존재, 마츠노 하나는 참극이 빚어낸 결과 앞..
상상 속의 삶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또다른 삶의 가능성 상실의 자리를 되짚어 가닿은 투명한 진실 우리는 이따금 삶의 무언가를 상실하지만 남겨진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은 한결같이 고되다.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클수록 극복의 과정은 버겁고 제 삶 마저 망가뜨리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기도 하기에. 스티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향한 분노는 늘 그의 삶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었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내 앨리슨 역시 자신의 곁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은 관계마저 어긋나게 만들었으므로. 하지만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되짚으며 아버지란 존재에 다가서고자 여행을 떠났고,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를 몹시 사랑했고, (…)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을”(p.426) 인정하게 ..
만일 그대가 나보다 먼저 간다면 | 허수경 | 난다 이 지구에 더는 없는 목소리의 유랑인 허수경의 마지막, 유고 시집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자리한 곳이 어디든 거기서 잘 지내라고……. 내게는 마흔두 편을 엮은 허수경 시인의 유고 시집이 시종 그렇게 다가왔다. 몸은 진작 떠났지만 남기고 간 시 안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안부 건네는 시인의 속삭임이 반가우면서도 조금 쓸쓸하게 느껴졌나 보다. 손금을 말하며 “서럽고 따뜻하고 흐릿하다”(p.58) 했던 감상이 마음속에서 자꾸 맴돈 탓인지도 모르겠다. 타향에서 지내며 마음 한편에 고이 자리를 내주었던 고국 생각…, 고향 땅의 모든 것에 촉각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그 세심한 마음들을 헤아려 보며 시인이 사라진 세상, 그럼에도 시인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계에 한동안 가닿을 수 있었다. 더욱이 수록된 세 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