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노르웨이의 숲』 30주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이 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와 일서 문고판(상·하)이 이미 책장에 꽂혀있고 시간의 텀을 두고 너댓번은 족히 읽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옷을 입고 반기는 마케팅의 꼬임에 넘어갈 수밖에……. 그래도 기존 소지하고 있는 『상실의 시대』가 유유정 번역이라면, 30주년 『노르웨이의 숲』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양억관 번역의 책이기에, 그것만으로도 어디냐며 그렇게 소장을 위한 합리화는 순식간에 완료됐다. 이참에 새 책으로 한 번 더 읽어봐야지, 마음 먹으면서.
그런데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말한 문학적 건망증이 다분해서 그런가, 다시 읽어도 지루하단 생각은 커녕 오히려 한번 더 반하고 말았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기묘하다'는 표현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뭐, 결국은 같은 책을 또 사도 괜찮았다는 주절거림.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대인의 고독과 청춘의 방황을 선명하게 포착한 현대 일본 문학의 대표작
이번에 읽으면서 머릿속을 메우던 생각을 조금 끄적여 보려고 한다. 바로 직전에 읽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의 여운을 머금은 채 읽은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얘기쯤으로 볼 수 있겠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은 누구의 인생에서도 녹록지 않다. 그래서 죽지 못해 산다는 이들의 하소연도 심심치 않을뿐더러, 그 중 일부는 중도에 그 삶을 스스로 끝내기도 하는 것이리라. 반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삶이 가지는 가치를 발견한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는 곧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를 지닌 이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 안에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여 그 시기의 기즈키와 하쓰미, 그리고 나오코와 그녀의 언니가 이 책을 읽었더라도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기즈키와 하쓰미, 그리고 나오코와 그녀의 언니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창창한 젊은 날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자연스레 그 편으로 생각이 흐르고 말았다.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뒤틀림을 교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뒤틀림에 익숙해지기 위한 거라고 했어.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 p.155
위선과 불합리의 세계를 목격하고 자신의 나약함과 마주하는 것, 그것을 최초로 인식하는 시기가 이 무렵의 나에게도 있었기에 '뒤틀림'에 대한 나오코의 고백을 그냥 흘러 보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씩 겪기 마련인 열병 같은 것이라, 크고 작은 흉터는 남을지언정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슬프지만) 무뎌지고, 나 또한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나오코나 기즈키는 자신이든 사회든 그것들로부터의 완전무결함을 꿈꿨던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혹은 고쳐지지 않을 거대한 장벽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로 인한 상실과 좌절, 공허의 상처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존재의 의미를 잃게 만든 것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와타나베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했기에 묵묵히 살아갈 수 있었던 걸까. 적어도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와타나베는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어이, 기즈키, 나는 생각했다. 너하고는 달리 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것도 제대로 살기로 했거든. 너도 많이 괴로웠을 테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야. 정말이야. 이게 다 네가 나오코를 남겨 두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아. 왜냐하면 난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가 더 강하니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 p.415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다. 살아갈 앞날을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여태껏 영유해온 삶 안에서 그 일부로서의 죽음을 목격하는 일, 그것은 어느 누구의 인생에서도 비껴가지 못하는, 마치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이므로. 소설 속 와타나베는 유일한 친구였던 기즈키의 자살로 인해, 삶 안에 일부로서의 죽음과 처음 마주한다. 또한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황하며, 기즈키를, 하쓰미를, 나오코를 구원했어야만 했지만, 구원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또한 뒤틀려 버린 자신과 현실 사이에서 애써 담담하게, 때론 치열하게 사투하며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한다. 스스로가 말했듯, 살아가기 위한 대가를 기꺼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 와타나베를 단단하게 하고, 한층 살아갈 의지를 샘솟게 했다고 생각한다. 레이코가 말했듯, 어차피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조금 열고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그녀의 충고가 한층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는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 p.485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이같은 지난한 여정을 통해 살아갈 앞날을 모색하지 않았던가. 제 의지로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자체, 그런 태도야 말로 더없이 청춘다운 모습이니까. 그것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을 통해 더없이 잘 그려냈다. 그것이 1987년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노르웨이의 숲』이 3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 p.20
"봄날의 곰만큼 좋아. (…)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 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 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 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 p.388
"자신을 동정하지 마. 자신을 동정하는 건 저속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 p.403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 p.419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있다.' 그것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 p.453
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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