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삶에 휴식과 이완을 부여하기 위해 일 년간 잠을 자기로 결심한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최승자 시인의 오래된 시 「나의 시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라 절규하던 마지막 행이 그것이었다. 차마 죽기는 뭣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일정 기간 동안 지금의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상황을 진정시키고 싶은 욕망. 그것은 차라리 삶에 대한 애착에 기반한 비명이고 몸부림이었다고 나는 이해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일 년간 잠을 자는 계획을 통해 실현시키고자 하는 이를 – 낯선 작가의 소설 안에서 - 조우했다. 그녀는 과거의 상처, 현재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이 엄청난 계획을 감행했으니, 애초 그 의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아주 치밀하고도 절박한 계획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오로지 삶에 대한 의지뿐이었으니까. 그 주인공은 스물여섯의 젊은 여성으로 부모에게 상속받은 유산과 뛰어난 외모 덕에 남들 보기에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통스러워한다는 데에서 - 앞서 언급한 - 일 년 간의 동면 계획은 시작된다. 그러고는 원활한 실행을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는데,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과의 정기적 만남은 이 계획의 핵심이랄 수 있다. 그러니까 일 년 간의 수면을 돕기 위해 필요로 하는 다량의 다양한 신경안정제를 제공받기 위한 방도인 것이다.
그녀가 감행에 나선 계획에는 비현실성에서 나오는 황당함이 분명하게 자리한다. 그러나 그 치명적 문제를 간과해서라도 한번쯤 실행해 보고픈 내 안의 숨은 욕망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그랬듯, 극복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 그로 인한 억압된 기억의 찌꺼기들로 막혀버린 현재의 내가 마주한 현실은 온갖 것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 부질없음으로 까지 왕왕 이어지곤 했으니까. 그렇기에 한층 무언가를 떨치고 나아갈 수 있는 힘에 대하여 자주 골몰하고 있는 요즘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 편의 - 때론 진지하고 더없이 신랄하기도 한 – 블랙 코미디 속 주인공을 통해 -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 한바탕 시원하게 대리 만족한 느낌이 신선했다. 여하튼 오래간만에 흥미롭게 읽은 소설!
고통만이 성장의 유일한 기준은 아니야. 나는 속으로 말했다. 잠이 효과가 있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기분이 들었고 감정도 살아났다. 좋은 일이다. 이제 이건 내 삶이다. 옛집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그 집이 곧 다른 사람의 기억 창고가 되리라는 사실을 이해했고 그건 아름다운 일이었다. 이제는 떨치고 나아갈 수 있다. - p.350, 351
내 휴식과 이완의 해 -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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