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인간 앞에 펼쳐진 대재앙의 그늘
곤노는 동성 애인과 헤어지고 발령받아 온 이와테 현에서 직장 동료로 만난 히아사와 − 청주를 좋아하고 낚시를 즐긴다는 공통분모로 − 차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히아사가 아무런 말없이 이직한 사실에 서운함을 느끼던 중,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가 일어나고 그가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그의 행적은 지금껏 자신이 알아 온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에 마주한 진실 앞에서 곤노는 홀연히 오이데 강으로 향한다. 올해 들어 첫 낚시였고 첫 입질에서 낚은 물고기는 뜻밖에도 무지개송어. 그러고는 “한참 강가에 우뚝 서 있”(p.91)는다.
그때에 곤노는 저무는 해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히아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그는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뭔가 큰 것이 붕괴되는 모습을 보면 좋아하고 쉽게 감동하는 인물”(p.10)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 자신을 향해 맹렬히 전진하는 집채만 한 파도가 어쩌면 그에게 –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진실되지 못한 자신의 추악함까지 덮어버릴 쓰나미에 묘한 희열을 느꼈으리라 짐작한다면 억측일는지.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히아사를 자신의 삶에서 떠나보내며, 진실은 늘 저편의 그늘 아래 있음을 깊이 고뇌하는 곤노의 모습만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자연재해 앞에서 한층 또렷해지는 인간이란 존재, 그 속에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그림자, 그 이면을 마주하게 한다.
“아들은 안 죽었소.” 도망 다니는 메뚜기 무리 사이에서 산무애뱀 새끼가 기어 나왔다. 지진 재해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던가, 영업이 중단된 가마이시 시내의 어느 은행 ATM을 쇠지레로 부수려다가 체포된 남자 이름이 조간신문에 났다. 막대로 찔러도 새끼 뱀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히아사가 그 남자의 동포라는 것에 든든함을 느꼈다. - p.91
영리 - 누마타 신스케 지음, 손정임 옮김/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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