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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과서에 윤동주 시 4편을 수록한 시인
“내가 가장 예뻤을 때”로 경쾌하게 시작하는 시는 이내 그녀가 사는 암담한 세상을 보여 준다. 비로소 전쟁은 끝났지만 조국은 패전국이 되어 남은 것이라고는 파괴된 거리와 넘쳐나는 죽은 이들뿐인 곳이다. 거기서 “비굴한 거리를 쏘다”니는 것 말고, 소녀는 무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는 담담한 고백에 가슴이 아릿해 오는 연유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될수록 오래 살기로” 했다는 그녀의 결심에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말하자면 희망이 아닐는지 하는 기대인 것이다. 이처럼 그녀의 시에 담긴 슬픔과 괴로움, 아픔은 그 자리에 고여 있지 않는다. 현실을 바로 보고, 그럼에도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짐으로써 삶을 낙관한다.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 역시 크게 위안받았으리라.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 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 나는 무척 덤벙거렸고/ 나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p.34, 35, 36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윤수현 옮김/스타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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