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들고 아픈 시대에 대한 혹독한 예감
‘살아 있음’에 대한 이토록 치열한 존재 증명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내 청춘의 시기를 함께 해준 그야말로 인생 시집이라고 여길 정도로 특별한 시집이다. 지금도 가끔씩 펼쳐보고 있을 정도로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서점 한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그날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책꽂이에서 꺼내어 무작위로 펼쳐진 페이지에서 처음 읽었던 시는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이었다. 오랜 궁리 끝에 일체의 불필요한 단어들은 제하고 오직 정제된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요샛말로 대단한 걸 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시였다. '아 썅!'을 마음속으로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한 소화제 같은 시였달까.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밍숭맹숭하기만 했던 그 시기의 나에게 새로운 자극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한순간에 매료되었던 시집 『이 시대의 사랑』은 강렬한 인상을 내품으며 내 마음속 책장에, 그중에서도 제일 손길이 닿기 쉬운 자리에 놓이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있다.
최근에 펴낸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는 시인이 젊은 시절 써내린 첫 시집에서 만났던 시들과 비교해, 서슬 푸르던 독기가 한층 사그라든 느낌이다. 말하자면, 치열하게 고민하고 분노하며 사투했던 것에서 한발 물러나, 생(生)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것들을 훌훌 털어버린 초탈한 한 인간의 고백을 듣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이십 대의 창창했던 나이에서 훌쩍 세월이 흘러 환갑의 나이를 넘어선 시인에게 어쩌면 당연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시들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탓인지, 삶에 대한 체념과 고독, 허무의 감정들을 써내린 『빈 배처럼 텅 비어』의 시들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청춘의 내가 『이 시대의 사랑』에 담긴 시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마음을 다독이고 정화했던 것처럼, 환갑 즈음의 나 역시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다시 읽는다면 분명 지금과는 또 다른 감상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보다 한층 공감하며 절절하게 이 시들이, 시구들이 다가올 것이라는, 그런 예감 말이다.
어찌됐든 이런 적잖은 변화에도 시인 특유의 생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 시에 대한 애정만큼은 여전하다. 시인 스스로가 고백한 바 있는 생존 증명서와도 같은 시들을 차례로 마주하면서, 이 세상에 '살아 있음'이 이편으로까지 온 가슴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빈 배처럼 텅 비어 - 최승자 지음/문학과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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