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이물질이던 나,
편의점은 나를 정상인처럼 보이게 해줬다."
후루쿠라 게이코(古倉恵子)는 대학 졸업 후 편의점에서 줄곧 알바만으로 생계를 이어온 서른여섯 살의 여성이다. 그녀는 '편의점'이라는 공간 안에서 '점원'다워진 모습으로 주어진 매뉴얼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스스로가 세계의 부품이 되었다고 안심한다. 그것만이 세상의 이물질이었던 자신이,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듯이. 그렇게 세계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가고자 안간힘을 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부분에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고방식이나 그에 따른 행동에서 다소 극단적인 면모가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인간 형상의 사이보그를 마주하는 듯해 괴이한 인상이었달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간 정도의 차만이 있을 뿐, 자신이 속한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고자 나름의 방법으로 고군분투하는, 어쩌면 지금 우리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을 잠시 잠깐의 재밋거리로 가벼이 넘길 수 없었던 이유였으리라.
나는 문득, 아까 나온 편의점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손과 발도 편의점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유리창 속의 내가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 "어서 오십시오!" - p.191
시작은 '편의점 인간(コンビニ人間)'이란 도대체 어떤 인간을 말하는 걸까,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일상에서 쉬이 드나드는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대한 친숙함, 그 너머에 자리하고 있을 온갖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이 한 권의 책이 말해 줄 것만 같은 기대감을 품게 했던 거다. 더군다나 편의점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다는 작가의 소개가 더해지니, 한층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이야기의 흐름은 예상과 달리 씁쓸함 내지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쪽으로 흘렀다. 멋대로 유쾌하고도 발랄한 이야기를 상상했던 탓에 당혹스러움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다 읽은 후의 뒷맛은 개운치 않았고, 되려 무거워진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책을 덮고 말았다. 그 대표적이었던 한 대목을 적어봐야겠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좀처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사람)을 향해 시라하가 일갈했던 한 마디다.
"모두가 보조를 맞춰야만 하는 거죠. 30대 중반인데 왜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가. 성행위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까지 태연히 물어봅니다. '창녀와 관계한 건 포함시키지 말고요' 하는 말까지 웃으면서 태연히 하죠, 그놈들은. 나는 누구한테도 폐를 끼치고 있지 않은데, 단지 소수파라는 이유만으로 다들 내 인생을 간단히 강간해버려요." - p.105
좀 과격한 표현이긴 하지만,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들, 일명 오지라퍼로 득실대는 세상에서 이런 유의 불만을 터뜨려 본 사람이 어디 시라하뿐이었겠느냐 싶었던 거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개인주의가 만연한 걸로 잘 알려진 일본 사회에서도 이 정도라면, 우리나라에서 인생을 강간당한 이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꽤나 무모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같은 불만의 목소리에 대한 후루쿠라의 반응이다. 그녀가 보기에는 시라하는 본인이 저지른 잘못은 조금도 생각지 못하고, 자신만이 피해자라는 듯 군다고 여긴다. 그러나 후루쿠라는 그런 속마음은 감춘 채, "네, 그거 큰일이군요."라고 엉뚱한 맞장구를 친다. 누가 불만을 터뜨리든, 분노하든, 남의 뒷담화를 하든 자신의 의견을 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호응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기뻐한다는 사실을 편의점 알바를 시작한 직후 체득했다는 그녀의 고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맞장구에 힘입어 생성된 불가사의한 연대감 속에서 자신이 능숙한 '인간'이 되었다고 안도하는 그녀의 모습은, 편의점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비로소 자신이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는 대목과도 상통한다. 그녀의 이같은 면모가, 시라하의 주장에 따르면 조몬(석기) 시대와 똑 닮은 오늘날에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처세술 인지도 모르겠다. 씁쓸함이 밀려온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지 않을까, 어쩌면 말이다.
편의점 인간 -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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