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뻗어나가는 말에 주저함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는대로 주절대 듯 거침없이 쏟아낸 단어와 문장은 하나의 시가 되었고, 마흔네 편의 시는 하나의 시집으로 엮였다. 화두는 곡두.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을 의미하는 단어. …그런 것들, 그러니까 실상은 없는데 있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란 말…. 가 닿고 싶은 마음에 허공인 줄 알면서도 손을 휘이 젓고 마는 시인의 언어를, 어두운 밤 희미하게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그렇게 기웃대다가 어쩌면 시인이 - 구태여 말하자면 일상을 깊이 파고드는 생활 밀착형 랩을 구사하는 - 래퍼일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결론…….
없음, 없음, 없는데 참
나는 뒤끝 짱
있음
- p.23 「나는 뒤끝 짱 있음 –곡두 6」 중에서
+ 한동안 소설을 읽으면서 ‘그녀’라는 단어가 나올 적마다 나도 모르게 ‘그년’이라고 읽는 일이 계속됐다. 처음 자각했을 땐 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고쳐 읽고 넘겼는데,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자 적잖이 당혹스러웠던 것. 평소엔 입밖에 내지도 않는 그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왜 자꾸 튀어나오는 건지…. 눈으로는 분명 ‘그녀’라고 쓰인 활자를 보긴 본 것 같은데, 머릿속으로 읽힌 출력은 ‘그년’이 되는 매우 기묘한 상황. 그때의 선뜩했던 기분…. 사실 그 시기 나는 엄청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마음속 분노가 공교롭게도 애꿎은 단어 ‘그녀’에게로 옮겨 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한참 뒤 생각한 일이 있다. 그렇기에 매우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예 근거가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잠정 결론 지은 일…. 시인이 파주 문발 씨유 편의점 간판을 보면서, 씨발을 떠올렸다는 이야기에 생각나서 해본 여담이다.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지음/문학과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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