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피해자인 방사선 전문의가 전하는
피폭지 참상 리포트
몇 해 전 나가사키에 간 일이 있었다. 원폭으로 인해 참혹했던 칠십여 년 전의 참상이 지금 발 딛고 있는 이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풍광이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일정의 마지막 날, 원폭 낙하 중심지를 비롯 평화공원과 원폭자료관에서 보낸 한나절은 이 도시에 잠들어 있는 큰 슬픔과 마주해야 했던 먹먹한 시간들로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그렇기에 『나가사키의 종』의 저자가 진작에 우려했듯, 지난 2014년 아베 정부가 헌법 9조(평화헌법)의 전쟁 및 무력행사 포기, 교전권 및 군대 보유 금지 조항을 집단적 자위권 행사로 그 방향을 선회하는 해석을 하며 각의 결정을 내렸다는 점이 심히 안타깝고 유감스러울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올해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 거부되기는 하였으나, - 원폭 희생자를 위해 묵념해달라는 요구를 하는 등 피해자로서의 호소는 계속되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과오로 피해를 입힌 조선인들과 그 외 역사적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대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음을 떠올렸을 때,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임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참상의 기록이 널리 읽혀 이와 같은 참화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함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나가사키의 종』은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한 참상을 기록한 글이다. 저자는 나가사키의과대학에서 방사선학을 전공한 의사이자 교수로, 투하된 당일에도 나가사키의대 부속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는 부상자들의 치료에 전념하며 본인 역시 피폭의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원폭 피해의 실태를 알리고 전쟁 결사반대를 외치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는 바람을 담고자 글을 남겼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많은 사람이 원자폭탄에 대해 두려워하고 또 궁금해 합니다. 나는 원자폭탄의 폭발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관찰한 것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상처의 붕대를 푼 바로 그날 병상에 앉아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이유입니다.”(p.7)라고 적고 있다. 힘겨운 가운데 남겨야만 했던 이 글들이 전쟁의 참담한 그림자가 희미해진 오늘의 우리에게 그날의 참상과 더불어 평화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희망을 이야기한다. 나가사키의 종은 우라카미 성당에 있던 두 개의 종 중에 원폭에서 살아남은 하나의 종을 말하는데, 폐허 속에서도 다시금 울리던 종소리는 저자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나가사키 사람들에게 생의 의지를 갖게 하는 동시에 평화의 염원을 담은 울림이었던 것이다. 몇 해 전, 눈부신 한낮의 나를 뭉클하게 했던 종소리가 문득 떠오른다. 그렇게 오늘도 우라카미 성당의 종은 나가사키 전역을 울림으로써 많은 이들로 하여금 평화의 정신을 일깨우고 있으리라.
“사랑하는 아이들아. 적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우리를 미워할 틈도 없을 만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면 사랑받는단다. 사랑받으면 멸망하지 않는단다, 사랑의 세계에는 적이 없단다. 적이 없으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니까.”(p.198)라는 유언을 끝으로 맺어진 이 참상 리포트는 2021년의 오늘에도 그 간절함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데엥, 데엥, 데엥"
종이 울린다. 폐허가 된 성당에서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가 원자 벌판에 울려 퍼진다. 이치타로 씨가 청년들과 함께 벽돌 밑에서 찾아낸 종은 50미터 높이의 종탑에서 떨어졌는데도 상처 하나 없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겨우 종을 매달았고, 청년들이 아침, 점심, 저녁에 종을 울렸다. 예전의 그리운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
"데엥, 데엥, 데엥"
청명한 종소리가 평화를 축복하며 울려 퍼진다.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종소리가, 두 번 다시는 멈추지 않겠다는 듯,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평화의 울림을 전하겠다는 듯 "데엥, 데엥, 데엥" 하고 다시 울린다.
인류여, 부디 전쟁을 계획하지 말기를. 원자폭탄이 있는 한 전쟁은 인류의 자살행위일 뿐이니. 원자 벌판에서 울고 있는 우라카미 주민들은 세계를 향해 외친다. 전쟁을 멈춰다오. 오직 사랑과 이해로 화해해다오. 우라카미 준민들은 잿더미에 엎드려 신에게 기도한다. "바라옵건데, 이 우라카미가 세계 최후의 원자 벌판이 되게 해주소서."
종은 아직도 울리고 있다.
- p.190, 191
나가사키의 종 - 나가이 다카시 지음, 박정임 옮김/페이퍼로드 |
+ 일본 나가사키(長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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