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초파리 돌보기」, 임솔아
해피엔드 소설을 써달라는 원영의 말에 지유는 ‘소설은 소설일 뿐’(p.31)이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고심할 수밖에 없다. 다름에 아닌 엄마의 간곡한 부탁인 연유다. 자신을 잊고 살아온 그녀의 고단했던 삶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완성된 소설은 결과적으로 원영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초파리에게 로열젤리가 있었다면, 원영에게는 소중한 딸, 나아가 그녀가 선사해 준 해피엔드 소설이 있었으니까.
이원영은 다 나았고, 오래오래 행복하다. - p.38
# 02. 「저녁놀」, 김멜라
눈점과 먹점은 모모에게서 새로운 쓸모를 발견했다. 이로써 모모는 박스 안에서 벗어나 표표와 파파야와 함께 햇빛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분노에 찬 성토는 힘을 잃었다. 자신들만의 보금자리인 좁은 옥탑방에서 지내는 눈점과 먹점에게도 어쩌면 그런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우선 당장에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 갈 수도 있겠다는 소망을 품었으니 차근하게 하나씩 하나씩 헤쳐 나갈 것이라고.
이 글은 대파 한 단이 육천칠백원 하던 시절, 세상으로부터 버려질 위기에 처했던 모모의 이야기다. - p.53
# 03.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서로에게 무해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한 일이리라. 다만 매 순간 조심하고 반성하며 고쳐나가고자 애쓰는 일에 주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이 관계를, 이 세계를 지탱하게 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호와 인주와 나누었던 지난날의 대화를 복기하는 ‘나’의 일은, 그것을 글로 옮기려는 시도에서 매번 실패하고 마는 ‘나’의 소설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쓰면 좋겠어요.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어요. - p.136
# 04. 「공원에서」, 김지연
공공을 위한 장소에서 전혀 공공을 위한 배려를 받지 못한, 외려 폭력의 피해자가 된 수진을 보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을 제2, 제3의 수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는 특정 성을 향한 혐오의 문제에 대하여, 묻지마 폭행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개’가 접두사로 붙어 완성되는 비속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작 이 공공의 장소에서 벌어진 참화에서 수진을 위로한 건 ‘개’ 밖에 없었으니.
문득 나는 내가 사는 걸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처음에는 너무 뜬금없고 이상한 감정처럼 느껴졌는데 점점 선명해졌다.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지만 나는 사는 게 좋았다. 내가 겪은 모든 모욕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복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는 건 좋다. 살아서 개 같은 것들을 쓰다듬는 것은 특히나 더 좋다. - p.173
# 05. 「미애」, 김혜진
선우를 모임에서 뺐다는 결정에 감사할 줄 알았는데 외려 화내는 미애를 보며 엄마들이 느꼈을 곤혹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욕망에 따른 얽히고설킨 모종의 이해관계에 가담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그러졌을 때의 당혹스러움이었으리라.
언니, 왜 그래요? 왜 그런 말을 해요? 난 다 이해해. 그럴 수 있어요. - p.217
# 06. 「골드러시」, 서수진
한때는 찬란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문 닫은 광산을 둘러보며, 서인과 진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호주에서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희망이 있었기에 감내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저 멀리 떠나보낸 현재의 자신들이 꼭 이 폐광과 닮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 골드러시 체험 상품이 그간 수순이었음을 예감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망설이고 있었던 어떤 중대한 결심을 하게는 했으리라.
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 p.253
# 07. 「두개골의 안과 밖」, 서이제
이유도 모른 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죄의식이 강하게 밀려온다. 철저하게 이성에 근거한 판단일지 몰라도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그들에겐 그것은 그저 도륙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글쎄, 유해 동물 이라니. 정작 이 세계의 최고 유해 동물임을 망각하고 선.
살생의 흔적을 간직한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날 수 없었다. 여기도 열처리 해야겠는데. 우리는 땅을 태워야 했다. 태워야만 했다. (…) 땅을 태우면, 우리의 과오도 함께 태워지기를.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렇게 되기를. 몇 달간, 악취를 쫓으며 느낀 바는 딱 하나였다. 우리가 늦었다. 우리는 이미 늦을 대로 늦었다. - p.301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임솔아 외 지음/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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