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단테 알리기에리」의 ‘나’는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광장 위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에 친구 중 하나가 로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참 엿 같은 도시야.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p.279)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두 번째 소설 『로마 이야기』를 관통하는 문장이자, 그녀의 진심이 물씬 담긴 표현이라 여기며 이 책을 덮었던 것부터 적어둬야겠다. 정말 아름답지만 그에 상응하는 증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애증이야말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솔직한 감정 중의 하나일 것이므로 한층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를 떠올리면, 인도계 이민 2세대로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했고 이후 이탈리아 로마로 이주한 이력과 그에 따른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 고민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소설들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로마를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그곳에 거주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 나아가 이 땅에 끝끝내 스며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고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며 묵묵히 살아간다.
작가의 시선이 머문 곳에서 피어난 이 아홉 편의 에피소드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것들을 내려놓고 나아간 이들만이 가닿을 수 있는, 그리하여 오직 자신의 의지로 진정한 나란 사람을 일궈 나간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 안에서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지독히 얽매여 스스로를 옭아맸던 정체성 너머의 진짜 중요한 이야기임을 깨닫게 한다.
나는 두 얼굴을 가진 내 삶의 학문적 해안을 일종의 연옥이라고 부르고 싶다. 로마는 여전히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흔들린다. 부서지고, 잘못되고, 상처받고, 버려지고, 죽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만, 나는 연결된 실을 자를 수가 없다. - p.275 「단테 알리기에리」
로마 이야기 -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마음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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