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없음'이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기억들
그로부터 흘러나온 미세한 파장이 건드리는 '보통의 시절'
표제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를 포함해 『조중균의 세계』, 『세실리아』, 『반월』 등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으로, 낯선 작가의 새로운 글을 읽는다는 묘한 설렘으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주변 어디에선가 목격한다고 해도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화자들과 그들에게 놓인 일상, 그 이면의 사소한 것까지도 포한한 모든 것들이, 범상치 않은 작가의 시선을 통해 재발견되고 재해석된 듯한 느낌의 글들이었다. 또한 짧은 호흡의 문장들이 모이고 모여 특유의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읽는 이의 머릿속에서 다소 불분명하고 흐릿했던 것에 차츰 색깔이 입혀지고 선명해지는 듯했는데, 그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사뭇 흥미로웠다.
#. 「너무 한낮의 연애」
필용은 내 평생의 사랑, 당신은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 당신은 내 마음을 산산이 부수고 떠났지, 내 사랑을 되돌려줘, 하는 퀸의 가사를 읊으며, 양희의 본가가 있는 문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주한 양희의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굴에 가까웠고, 오리 농장이라 들었던 것은 온데간데없이 힘없는 오리 새끼 몇 마리 만이 꽥꽥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날 필용은 앞으로 한 걸음만 옮기면 손이 닿을 수 있었던 양희를 두고 돌아선다. 그가 전율했던 사랑이 아주 뻥 뚫린 것처럼 한순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무엇으로도 대체되지도 변형되지도 않고 아주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민과 구애의 뒤엉킨 감정 속에서 완전히 보내버린 것이다.
십육 년의 세월이 흐르고, 필용은 직장에서 좌천된다. 그리고 홀리듯 찾은 곳이 느닷없이 양희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고, 또 느닷없이 사랑 고백을 철회당했던 종로의 맥도날드였다. 그곳에서 필용은 대표 메뉴였던 피시버거가 아예 흔적도 없이 아주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그저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는 것은 아닐까. 필용은 너무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십육 년 뒤의 한낮에서야 문득 그런 생각에 잠긴다. 양희의 허스키를, 스키니한 몸을, 가벼운 주머니와 식욕 없음을, 무기력을, 허무를, 내일 없음을 사랑했던 그 시절의 자신을 제 의식 속에서 애써 덮어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도 어떻다고?" "사랑하죠. 오늘도." 필용은 태연을 연기하면서도 어떤 기쁨, 대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불가해한 기쁨이었다. - p. 25
필용은 닫혀 있는 공연장 문을 보며 오늘은 누가 무대에 올라가 그 시간을 견디고 있을까 생각했다. 처음에는 견디다가 나중에는 받아들이다가 응시하게 되는 그 시간을. - p. 40
양희야, 양희야, 너 되게 멋있어졌다. 양희야, 양희야, 너, 꿈을 이뤘구나, 하는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안녕이라는 말도 사랑했니 하는 말도, 구해줘라는 말도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양희의 대본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 p. 42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지음/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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