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빙수 가게
요시모토 바나나가 보내는 눈부신 한여름의 풍경
마리와 하지메가 꾸려 가는 두 평 남짓의 조그만 빙수 가게. 에어컨도 없는 어둡고 비좁은 공간이지만, 이곳은 단순히 얼음을 갈아 팔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그녀들의 꿈이 비로소 시작되고, 실현돼 가는 공간인 것이다.
마리는 지난 여름, 남쪽 섬 여행에서 들렀던 빙수 가게에서의 황홀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달콤 시원했던 빙수의 맛은 물론, 가게 뒤로 펼쳐진 망고스틴 가로수길과 그 끝에 자리한 바다를 포함한 모든 것을. 그래서 다니던 도쿄 단기 미술 대학을 졸업하자, 고향 니시이즈 - 마음이 늘 돌아가는 곳 - 의 바다가 보이는 솔숲 중간에 빙수 가게를 연다. 그 여름, 하지메는 오랜시간 의지하던 할머니를 떠나 보내고, 마음의 안식을 찾아 마리의 고향집에 머물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마리와 하지메의 한여름의 동거는 여태의 삶을 되돌아보고, 지금 이 공간에서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일상에 감사를, 설레는 앞날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는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사실은 얼굴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근원에 있는 것을 본다. 분위기와, 목소리, 그리고 냄새…… 그 전부를 감지한다. - p.12
다양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강은 변함없이 거기에 존재했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그리고 다리 밑에서 보는 바다에 저녁노을이 비칠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를 올려다볼 때마다, 나는 왠지 시간이 아깝다는 기분이 든다. 불현듯 행복에 가슴이 메일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이 있을 장소를 갖고 있다는 행복이었다. 아, 그러네. 나는 정말 내 가게를 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황홀한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 p.32
그렇다, 생각해 보면 밤바다 속에서 빛나는 생물과 함께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헤엄친다는 것, 으스스하기도 하고 멋지기도 한 묘한 느낌이었다. 정말 굉장하다. 살아만 있어도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 p.63
사람은 사람과 함께 있어 보다 커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봐 주는 사람이 있다. 그 하나로도 나는 운전을 아무리 오래해도 좋고 저금이 바닥나도 좋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경치, 정말 엄청나네. 하느님의 기분이 어떤지 알 것 같아.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것 같아." - p.76
여기는 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나의 장소다. (…) 얼음은 녹아 금방 없어지는 것이라, 나는 늘 아름다운 한때를 팔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순간의 꿈, 그것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어린아이도 나이 지긋한 어른도 다들 신기해하는, 이내 사라지는 비눗방울 같은 한때였다. 그 느낌을 정말 좋아했다. 그러니 그것을 잡아 조금이라도 어디에 고정시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얼음은 엷고도 달콤하게 사라진다. 그것은 거의 기적이었다. 나는 그걸 좋아했다. 그저 단순히 좋아했다. 처음에는 그 자잘하고 하얀 안개 같던 것이 점차 덩어리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물이 된다. 모두 달콤하게 배로 들어간다. 그런 느낌. - p.100
나는 내 가게를 꾸려 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만나리라. 그리고 또 많은 사람을 이렇게 배웅하리라. 일정한 장소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갈 때가 되면 보내야 한다……. 게이트볼을 치는 할아버지들,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부모도. 내게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가 빙수 가게에서 뛰어나니고……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은 전혀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너무 소박해서 답답하고, 따분하고, 똑같은 나날의 반복인 것만 같지만…… 하지만 무엇인가 다른 게 있다. 거기에는 분명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나는 계속해 간다. - p.140, 141
의도하고 자긍심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고, 머리를 써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면 정말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지금까지 형태도 흔적도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그걸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누가 없애 버리려 하거나, 일부러 획일화하려 해도, 아무리 억압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그런 힘을. - p.148
성큼 다가오는 여름의 문턱이면 길게 한숨부터 나오기 일쑤였다. 내게 여름은 마치 수도승의 고행과도 같은 나날과 다름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매번 여름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던 팔 할은, 매미 덕분이었다. 열어 놓은 창밖 어디에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자면, 마치 무더위 속 갑갑한 공기층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가끔은 매미 한 마리가 방충망에 붙어 우렁차게 울어대는 날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시끄럽다기보다는 오히려 횡재한 듯한 기분이 들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더위에 축 쳐졌던 몸과 마음에 불끈 힘이 솟아나는 기이한 경험을 더러 했던 이유다.
여름날의 마리에게 빙수는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곱게 갈린 얼음 한 입을 베어무는 것만으로도 한여름의 시름이 눈 녹듯 사라지는 진기한 경험 같은 거. 나아가 그 위에 올려진 사탕수수, 감귤, 패션프루트, 단팥은 달콤한 꿈이라도 꾸게 하듯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마리는 그 달콤한 시간을 혼자만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한다. 손수 빙수 기계를 돌려가며, 정성스러운 한 그릇의 빙수로 그 소중한 순간들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다. 무척이나 멋진 일이지 않은가.
때마침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청량한 기분이 되었다. 한결 사뿐해진 몸과 마음… 그리고 이 기분, 이 느낌……. 바다와 빙수만 있다면, 매미 소리가 있다면, 그리고 『바다의 뚜껑』이 있다면, 이 여름… 눈부시게 빛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바다의 뚜껑 -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
'별별책 > 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 문학동네 (0) | 2016.08.21 |
---|---|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 백영옥 | arte (0) | 2016.08.15 |
스노우맨 | 요 네스뵈 | 비채 (0) | 2016.08.11 |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문학동네 (0) | 2016.08.06 |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 혜민 | 수오서재 (1) | 2016.07.24 |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에밀 시오랑 | 챕터하우스 (0) | 2016.07.18 |
빈 배처럼 텅 비어 |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1) | 2016.07.08 |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현대문학 (0) | 2016.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