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자, 나혜석의 구미 유람기
‘나혜석(1896-1948)’이라는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실로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을 꽤 오랜 시간 알아 왔다. 그녀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정식으로 서양화를 배운 최초 여학생이라는 이력은 눈여겨볼 만 한데, 더욱이 출중한 실력으로 입선하며 개인전을 여는 등의 꾸준한 활동은 여성이라서 한층 제약이 심했던 당시 사회적 흐름 안에서 차라리 특이에 가깝다. 근래에는 페미니즘 열풍과 맞물려 페미니스트로서의 나혜석이란 존재, 그녀의 삶이 보다 주목받고 있는 듯하다. 딸이고 아내이자 며느리이며 엄마이기도 한 여성을 논하기 전에 그저 한 명의 사람임을 주장했던 그녀는 그런 생각을 시와 소설 등을 통해 거침없이 표현했는데, 이런 활동들이 회자되면서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나혜석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평소 애청하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그녀가 2∙8 독립선언에 참석하고 3∙1 운동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투옥까지 됐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음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그야말로 나혜석은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보인 동시에 시대를 앞서 간 이였다는 데에는 이견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꽃의 파리행』은 나혜석이 1년 8개월의 시간을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보내며 남긴 유람기이다. 조선과는 사뭇 달랐던 이국적 풍광에 대한 그녀의 시선이 흥미로운데,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점철되는 그녀의 행보는 살았던 시대를 달리 할 뿐 지금의 우리와 별 반 차이 없는 열정과 고민, 바람을 가졌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새삼 깨우치게도 한다. 오랜 연인을 떠나 보내고 열렬히 구애했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할 때 그녀가 내세웠던 조건 – 평생 자신을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할 것, 첫사랑이었던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 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파격적이랄 수 있는데, 그것을 김우영이 수용하면서 이루어진 결혼 생활은 이 유람의 시기, 파리에서 만난 최린과의 불륜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게 이혼 당하고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세상의 온갖 지탄의 표적이 되었던 그녀는 그 불합리함에 대하여 이혼고백장 등을 통해 통탄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행려 병자로 외로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이 유람의 시간은 여러 측면에서 그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즉, 그녀의 구미 유람은 서구 예술가적 방향성의 확립은 물론 가정 내 여성의 삶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이해를 고양시킨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마음속 깊이 갈망하게 만든 셈이다. 그러나 유람 이후 여생을 살아야 했던 조선이란 땅은 그런 그녀의 희망과 포부를 온전히 끌어안기에는 한참은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에 비극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8개월 간의 구미 유람의 경험은 자연인 나혜석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갈 앞날의 방향성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성취의 시간이었으리라. 나아가 그녀가 기꺼이 향했던 그 길이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의 우리 역시 가야할 길임을 다시금 상기하게도 한다.
피렌체는 예술의 도시라, 시가를 걷는 것은 마치 미술관을 걷는 것 같다. 어느 건물, 어느 성당, 어느 문, 어느 창, 어느 조각이 예술품 아닌 것이 없다. 물론 우리는 이 맛으 보러 왔지만 저 아르노강물로 키운 단테, 미켈란젤로, 조토, 마사치오, 보티켈리, 도나텔로 등 천재의 자취를 보러 온 것이다. 그들이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땅을 밟았겠지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 - p.140
꽃의 파리행 - 나혜석 지음, 구선아 엮음/알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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