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
그 앞에 움츠러든 한 소시민을 둘러싼 세계
상당히 부당해 보이는 어떤 상황을 목도했을 때, 대개 사람들은 불편한 마음을 뒤로하고 눈감는다. 자기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 아닌 이상, 어느 모로 보나 그 편이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므로. 그럼에도 때때로 우리는 마주하곤 한다. 침묵하지 않고 용기 내어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나는 그들 몇몇이 존재하기에 이 세계가 조금이나마 나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등장하는 빌 펄롱은 그 몇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물론 처음부터 용기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에게는 아내 아일린과 그 사이에서 낳은 다섯 명의 딸을 부양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더욱이 사람들이 쉬쉬하는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것, 더욱이 그 상대인 — 적어도 겉으로는 지역 사회를 위해 일하여 평판이 좋은 — 수녀원과의 마찰은 자칫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그러나 옳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고도 뒤돌아 선 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미사를 보러 갔던 그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어쩌면 외면한 채 트럭에 올라 내달리다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길을 묻는 그에게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p.54) 하고 답하던 노인의 말이 결정적으로 그를 각성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느 선택을 할는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린 일임을 깨우치며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세라를 구출하기로 마음먹고 수녀원으로 향했다. 이 같은 결단은 지난날에 자신과 어머니가 미시즈 윌슨과 네드에게서 받은 진심 어린 배려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한 인간을 올곧은 삶으로 이끄는 것은 어쩌면 사소하지만 결코 등한시되어서는 안 될 주위의 관심, 그 안의 친절과 격려가 아닐는지 생각해 보며.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두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p.120, 121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다산책방 |
'별별책 > 202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 지내니 | 톤 텔레헨 | arte (0) | 2024.03.23 |
---|---|
애틋하고 행복한 타피오카의 꿈 | 요시모토 바나나(글)∙수피 탕(그림) | 한겨레출판 (1) | 2024.03.16 |
헤르만 헤세의 나로 존재하는 법 | 헤르만 헤세 | 뜨인돌 (0) | 2024.03.09 |
요코 씨의 말 1 - 하하하, 내 마음이지 | 사노 요코 | 민음사 (0) | 2024.03.02 |
사라진 것들 | 앤드루 포터 | 문학동네 (0) | 2024.02.17 |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 | 필리프 들레름 | 문학과 지성사 (1) | 2024.02.10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패트릭 브링리 | 웅진지식하우스 (0) | 2024.02.03 |
호로요이의 시간 | 오리가미 교야 외 | 징검돌 (1) | 2024.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