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시간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현실로 회귀한다
끝없는 사유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춘의 초상
『밀라노, 안개의 풍경』,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에 이어 집어 든 『베네치아의 종소리』. 1960년대 일본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던 나날을 추억하며 적어 내린 연작 에세이다. 다만 먼저 두 권과 달리 일본에서 보낸 유년기와 가족사, 그 시절 가족에 대한 인상 등 유독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때로는 갈등하고 서운해하기도 하지만 훗날 이해하고 용서하며 화해하기도 하는, 여느 집안과 다를 바 없는 일화들 안에서 한층 인간 스가 아쓰코에 한 발짝 다가가는 기분을 자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표제작인 「베네치아의 종소리」는 단연 그 정점에 있는 에세이다. 심포지엄 참석 차 들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뒤풀이 만찬을 마치고 친구(아드리아나)와 헤어져 호텔로 돌아가던 길에 마주한 페니체 극장, 그곳에서 들려온 오페라 선율은 지난날 파리에서의 유학 시절을 거쳐, 일본에서 보냈던 유년의 나날로 그녀를 이끈다. 어둠 속 혹여 길을 헤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의 미세한 떨림이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통해 한순간 달뜬 마음으로 전환되는 그야말로 우연의 찰나가 빚어낸 환상인 셈이다. 어스름이 내려앉아 차분하게 가라앉은 잔잔한 흐름 속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밀라노, 안개의 풍경」에서도 묘사한 바 있는, 고요히 흐르고 있는 기억 속 안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도 한다.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속 한 여인의 담담한 회상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그녀만의 독보적 세계를 형성하는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한동안… 어쩌면 꽤 오랜 시간, 그녀의 기억 속 풍경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스스로가 길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시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문장이 나를 동요시켰다. “스스로 대성당을 짓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성된 대성당에서 편하게 자신의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샤르트르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내 안의 대성당을 떠올리며, 도쿄의 두 친구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생각했다. - p.155 「대성당까지」
베네치아의 종소리 -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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