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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산문집
스물세 편의 글을 모두 읽고서 책 정보를 살펴보니 초판 시기는 2002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하고도 일 년 전이 되고, 여기 엮인 산문들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95년부터 쓰인 것을 엮었으니 삼십 년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글을 읽는 나로서는 강산도 세 번 바뀔 그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문장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박완서 작가를 마주했다. 그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그 끝에는 — 단박에 우리의 눈을 홀리는 빛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 저 밑의 하찮고 소박해서 쉬이 업신여겨지거나 지나칠 법한 것에 진득하게 머무르며 그 작은 것들에 목소리를 보태는 따스함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삶의 희로애락, 그 모든 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어서 더 소중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늙은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산천이나 초목처럼 저절로 우아하게 늙고 싶지만 내리막길을 저절로 품위있게 내려올 수 없는 것처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나이가 좋다. 마음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안하고 싶은 건 안할 수 있어서도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도 않다. 안하고 싶은 걸 안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도 않다. 볼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번 본 거 두번 보고 싶지 않다. 한겹 두겹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시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마음속에 나를 억압하는 찌꺼기가 없어져서 못 쓰는 거라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결국은 가벼워지기 위해 썼다는 게 가장 맞는 말이 될 것이다. - p.203, 204 「놓여나기 위해, 가벼워지기 위해」
두부 - 박완서 지음/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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