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 용서와 화해, 삶의 의미를 되짚는
감동적인 대서사시
“알겠지만, 평화는 일이나 쾌락, 이 세상이나 수녀원이 아닌 자신의 영혼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답니다.” - p.192
원장 수녀가 했던 말을 떠올려본다. 수녀원에서 봉사하기를 바라는 키티의 간절함 뒤에 숨은 불안하고 혼란한 심리를 간파한 그녀였기에 건넬 수 있던 조언이었으리라. 키티는 그렇게 “봉사하는 일에서 영혼을 재충전하는 길을 발견했”(p.192)고,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후회하는 동시에 외도 상대였던 찰스 타운센드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었는지를 깨우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외도한 아내를 사랑했던 스스로를 참을 수 없었던 월터는 제 영혼 속에서 평화를 찾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렇게 엇갈린 부부의 운명은 키티가 홍콩에 돌아와 찰스를 마주하게 되면서 다시금 시험대에 오르고, 머리로 한 깨달음과 결심이 무색해질 만큼 쉬이 욕망에 휘둘리고 마는 존재의 허약함을 적나라하게 보이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자신을 가득 채우던 허영과 욕망을 다시 한번 뉘우치며 자신이 품은 생명만은 스스로가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데에 있으리라.
책을 덮으며 문득 월터 페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 외도를 저지른 키티에게 콜레라가 극성인 중국의 메이탄푸로 자신과 함께 떠날 것을 요구했던 그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결정 안에는 온갖 상반된 감정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을 테고, 그것 중 어느 하나도 또렷하게 그의 마음을 대변하리라는 확신 역시 없었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다만 그녀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의 상처는 그의 영혼을 옭아맸고 신성한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에게 필요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면 — 키티가 그랬던 것처럼 — 스스로에 대한 경멸을 넘어서는 용서와 포용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과거는 끝났다. (…)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닥쳐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 모든 인간의 번뇌가 하찮게 쪼그라들었던 그때. 태양이 안개를 헤치며 떠올랐고 구불구불한 길이 논 평야 사이를 뚫고 작은 강을 가로질러서 시야가 닿는 곳까지 쭉 펼쳐진 장면이 그녀의 눈에 선했다. 굽이치는 자연을 뚫고 지나간 그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었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은 짓들과 그녀가 겪은 불행이 아마도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희미하나마 가늠할 수 있는 그녀 앞에 놓인 그 길을 따라간다면, 친절하고 익살맞은 늙은 워딩턴이 아무 곳에도 이르지 않는다고 말하던 길이 아니라, 수녀원의 친애하는 수녀들이 너무나 겸허히 따랐던 길, 평화로 이어지는 그 길을 간다면 말이다. - p.332, 333
인생의 베일 -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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