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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아무것도 명확한 것은 없다. 시간도 공간도,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의 그 무엇도. 단지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지금 이 순간을 유영하고 있을 뿐. 배수아 작가의 『뱀과 물』에 엮인 7편 안에서 그렇게 나는 오직 이 순간만을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p.94)으로 지냈다. 거기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는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품으면서.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를 마주했다. 나는 그 아이를 나의 일부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그 아이는 곧 나인 거라고, 그 아이가 있음으로 해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그것이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그저 탈주하는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일 뿐임이 명백해진 연유다.
어린 시절. 그것은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여교사는 생각했다. 모든 비명이 터지기 직전, 입들은 가장 적막했다. 시간과 공기는 맑은 술처럼 여교사의 갈비뼈 사이에 고여 있었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 p.223, 「뱀과 물」
뱀과 물 - 배수아 지음/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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