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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불패의 명인’
슈사이의 생애 마지막 대국
바둑이 지닌 구도적인 면모와 예술적 품격을
서정시처럼 그려 낸 걸작
‘나’는 제21대 혼인보(本因坊) 슈사이(秀哉) 명인의 생애 마지막 대국 관전기를 쓰기 위해 은퇴기를 참관한다. 그 길고도 지난한 승부 가운데, ‘나’의 시선은 줄곧 병환 중임에도 혼신의 힘을 쏟는 명인과 젊지만 실력 있는 신예 기사를 매섭게 좇고 있다. 그 안에서 바둑을 향한 “고매한 정신의 모습”(p.59)을 목도하는 한편 “승부에 대한 흥미뿐만 아니라 한 가지 예도에 대한 감동”(p.101)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것은 오로지 바둑을 위하여 온 생애를 걸어온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나아가 이룩할 수 있는 예술적 경지였으리라는 것도 깨닫는다.
사실 바둑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기보를 묘사하는 장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섬세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묘사 안에서 생생히 되살아난 최후의 대국은 실로 경이로웠다. 끝까지 도전하고 마침내 완주함으로써 자신이 일평생 걸어온 그 길의 숭고한 가치를 스스로가 증명해 낸 연유다. 그 안에서 ‘명인’ 이라는 칭호의 무게감을 엿본 듯도 하다.
보라! 명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가쁜 숨결이다. 그러나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규칙 바른 물결이었다. 격렬한 무엇이 차오르는 것일까, 내게는 그리 보였다. 무엇인가 명인 안으로 신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명인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듯, 그래서 나는 더욱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순식간이었고 명인의 호흡은 절로 차분해졌다. 어느새 원래의 숨결대로 편안하다. 나는 이것이 싸움에 임하는 명인의 정신적 도약판인가, 싶었다. 명인이 무의식적으로 영감을 맞이하는 마음 성향일까. 아니면 불타오르는 기백과 투지를 가다듬고 무아(無我) 삼매경으로 맑게 넘어가는 입구일까. '불패의 명인'이라 불리는 까닭은 이런 데에도 있었던가. - p.38
명인 -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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