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매듭지어야 할
두 사람을 향한 필멸의 과제,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진실의 아이러니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곧 진실이라고 여기기 쉽다. 심지어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의구심을 품더라도 여태껏 자신이 해 온 판단과 소모한 감정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 느끼고는 더욱 열성적으로 믿는 경우마저 더러는 있지 않은가. 꽤나 무모하고 허망한 일임에도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지고 마는 것을 이따금 목도한다. 그런 까닭에 삶의 이모저모에서 발견한 믿음의 균열을 섬세하게 감지하고 판단을 제고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함과 용기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함을 절감한다.
소설 속 닐은 엘리자베스 핀치와의 관계에 대하여, “그녀는 나에게 조언하는 벼락이었다”(p.243)고 회고했다. 삶의 위기에서 마주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와의 수업은 그에게 “훨씬 현실적이고 훨씬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를 남”(p.260)긴 연유였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세월을 흠모하며 존경해 마지않던 그녀가 죽고서도 그는 “자신의 고집스러운 기억”(p.287) 안에서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함께 수업을 들었던 안나와 제프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로소 자신의 기억과 이해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분명 타인을 이해하려는 관심과 노력 안에서 유의미한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만은 타당하리라. 다만 그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해석과 판단이 개입함으로써 굴절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기 십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런 까닭에 닐이 엘리자베스 핀치를 흠모하는 마음에 비례하는 배움이 있었더라면, 단연 “우리는 삶에서 늘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p.40)고 했던 그녀의 조언과 수업 중 인용한 적 있었던 — 에픽테토스의 『편람』의 핵심 머리말 — 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 p.42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다산책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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