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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0

복자에게 | 김금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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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어떤 실패도 삶 자체의 실패가 되지 않도록,
모든 넘어짐을 보듬는 작가 김금희의 가장 청량한 위로

 

 

 

소설 『복자에게』가 관통하고 있는 이야기 안에서 삶을 향한 용기, 희망의 기운이 은근하게 전해온다. 우리 각자는 ‘울고 설운 일’ 투성인 삶 속에서도 기어이 이어가고자 안간힘을 쓰는 존재들이기에 영초롱이와 복자, 그 밖의 인물들을 통해 위로받고, 다시금 다짐도 하게 되는 것이리라. 흔들릴 수는 있지만 쉬이 꺾이지는 말자고, 그리하여 계속해서 나아가자는.

 



#. 새별오름에서의 일


소설의 후반, 복자는 영초롱이에게 전화를 걸어 ‘새별오름에 가본 적 있어?(p.213)라고 묻는다. 그렇게 오름을 오르는 동안, 저 멀리 보이는 ‘나 홀로 나무’, 복자의 결혼식과 할망 이야기를 거쳐 정월대보름이면 오름에 불을 놓아 억새를 태우던 제주의 오랜 풍습에 대하여 대화 나눈다. 그러고 나서 복자는 그녀를 불러낸 진짜 이유를 털어놓는데, 영초롱이는 상처받은 얼굴로 돌아선다. 어린 시절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가 성인이 돼 재회한 그녀들이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되는 절정이랄 수 있겠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여러 해 전, 제주에 갔다가 새별오름에 올랐던 일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그날은 온종일 짓궂은 날씨였는데 삼분의 일정도 올랐을까, 빗낱이 무서울 정도로 굵어진 데다가 귀신 소리를 내며 매섭게 불어대는 바람까지, 그렇지 않아도 물기에 축 처진 억새들은 가엾을 정도로 매몰차게 꺾여 땅에 처박히고 있었다. 더군다나 빗물로 잔뜩 미끄러워진 길을 불어대는 바람에 맞서 오르기란 거의 히말라야 등반과도 같았고, 내 몰골은 진즉에 말이 아니게 됐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곤란한 일은 그 절반 어디쯤에서 내려가기도, 그렇다고 올라가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낭패감이 순간 엄습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하릴없이 거기 쪼그려 앉아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한동안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바람이 다소 잠잠해진 틈을 타서 정상에 올랐던 기억이다. 무탈하게 내려왔기에 하나의 추억이 돼 버린 무용담. 하지만 이따금 생각하곤 한다. – 복자가 그랬듯, 그런 그녀 옆의 영초롱이가 그랬던 것처럼 – 어떤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너무 낙담하거나 자책하지 말자고, 두려워하지 말고 차분하게 내가 나아갈 길에 대해서만 골몰 하자는 이를테면 나와의 약속. 그렇게 나의 위기 탈출 무용담은 하나 더 늘어가는 것뿐이라는 패기로 말이다. 문득 새별오름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밤이다.

 

 

 

나는 한 계절 몇 달 만에 그렇게 멀어져버린 그곳에 대해 슬픔을 느꼈다가 따귀를 갈기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이를 꽉 물고 그런 마음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복자처럼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꼿꼿이 서 있으려고 노력했다. 도시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몸 자체를 쥐고 흔드는 바람의 세기에 적응하고 싶었다. 그 힘을 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것, 에워싸이고도 물러서지 않는 것, 바람이 휘몰아쳐도 야, 야, 고복자! 이렇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 춥거나 햇볕이 따갑다고 엄살떨지 않는 것.    - p.86, 87

 

 

 

 

 

복자에게 - 8점
김금희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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