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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단상

하나님은 보뱅의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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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고서 책과 독서, 글쓰기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에 매혹됐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순수한 문체가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러므로 그의 또 다른 책을 알아보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이 책 저 책 너저분하게 쌓아두고 방랑하며 읽곤 하는 지라, 이번만큼은 읽고 있는 책들을 모두 마치고 홀연한 마음으로 그의 새로운 글을 마주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책장에 고이 꽂아 두어야만 했던 『환희의 인간』을 오늘에서야 펼쳐 들었다. 마침 연휴 첫날 한가로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니 마음마저 한결 느긋해져, 그야말로 독서하기 딱 좋은 시간.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첫 글귀부터 과연,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어지는 서문의 글, 그러니까 파랑에 대한 이야기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름”(p.21)에서 시작된 그의 문장은 “장엄한 푸름”(p.21)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그것은 곧 삶의 푸르름을 내게 말하고 있다고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흥은 첫 글 「마리아예요」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뒤에서 두 번째 단락의 한 단어가 내 마음속 고요를 깨버린 것이다. 글쎄, 하나님…이라니. 단순히 보아도 그 앞 단락에서 교황을 적었고 문제의 단락에서도 성당과 수녀를 적은 걸로 봐서 문맥상 하느님의 보살핌이 타당하다 여겨지는데, 활자는 다시 보아도 하나님이었다. 이건 그야말로 느닷없는 출현이라고 밖에는.

외국 작가의 글은 옮긴이를 거쳐 읽게 되니 그 단어의 선택이나 말의 뜻이 왕왕 의뭉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문은 뭐라 적혀 있었을까? 내가 만약 번역할 역량이 있다면 과연 옮긴이와 같은 단어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남기기에 말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봐도 성당에서 하나님 찾는 건 많이 이상했다. 읽던 책을 덮어두고 혼자 하나님을 중얼대다가 문득 이 단어 하나에 나는 왜 이렇게까지 서성이고 있는지 좀 우습기도 했는데 한편 진심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보뱅의 뜻이었을까. 옮긴이와 편집자, 출판사의 뜻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무지인 걸까. 

 

차라리 신이었다면…. 모르겠다. 믿는 이들의 하나님을 존중은 하지만, 오늘 내가 읽은 이 대목에서의 하나님은 조용히 가위표 해두는 것으로 마무리하련다. 책을 읽고 수용하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니까. 흥은 조금 깨졌지만, 한 숨 고르고 이어질 보뱅의 반짝이는 문장들을 마저 만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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