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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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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경성 | 김인혜 | 해냄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식민지에 이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격랑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던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상과 박수근, 이중섭과 김환기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 내어놓은 몇몇 대표작과 — 예술을 향한 그들의 열정에 대한 — 단편적 일화만을 겨우 떠올릴 뿐이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술혼을 불태웠으리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살롱 드 경성』은 그런 그들의 삶과 작품을 살피고 있다. 그 안에서 나는 —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 제 안에서 꿈틀대는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갈망을 실현시키고자 분투했던 그들의 집념과 노고, 그 예술혼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술이 삶 그 자체였고, 그런 삶은 곧 예술이었..
트리에스테의 언덕길 | 스가 아쓰코 | 뮤진트리 십삼 년간의 밀라노 생활을 회상하는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집   스가 아쓰코의 『밀라노, 안개의 풍경』, 『코르시아 서점의 친구들』, 『베네치아의 종소리』를 차례로 만나보면서 그녀가 그린 섬세한 기억의 풍경에 매료됐었다. 어쩌면 그 팔할은 소란한 가운데 고요를 이끄는 그녀만의 단아한 문체의 영향이기도 했으리라. 이번에 국내에 처음 소개된 『트리에스테의 언덕길』은 그녀의 밀라노 생활 중 남편 페피노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엮고 있다. 그런 까닭에 가족을 향한 그녀의 시선이 머문 자리를 가만히 따르는 사이, 스가 아쓰코라는 한 존재에게 한층 친밀하게 가닿게 된다. 그녀 안의 따스함과 그 보다 더 깊숙이에 자리한 단단함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오랜 시간 이국땅에서 자신이 머물 자리를 차곡히..
명인 | 가와바타 야스나리 | 민음사 전설적인 ‘불패의 명인’  슈사이의 생애 마지막 대국 바둑이 지닌 구도적인 면모와 예술적 품격을  서정시처럼 그려 낸 걸작   ‘나’는 제21대 혼인보(本因坊) 슈사이(秀哉) 명인의 생애 마지막 대국 관전기를 쓰기 위해 은퇴기를 참관한다. 그 길고도 지난한 승부 가운데, ‘나’의 시선은 줄곧 병환 중임에도 혼신의 힘을 쏟는 명인과 젊지만 실력 있는 신예 기사를 매섭게 좇고 있다. 그 안에서 바둑을 향한 “고매한 정신의 모습”(p.59)을 목도하는 한편 “승부에 대한 흥미뿐만 아니라 한 가지 예도에 대한 감동”(p.101)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것은 오로지 바둑을 위하여 온 생애를 걸어온 자만이 다다를 수 있는, 나아가 이룩할 수 있는 예술적 경지였으리라는 것도 깨닫는다.사실 바둑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
뱀과 물 | 배수아 | 문학동네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아무것도 명확한 것은 없다. 시간도 공간도,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의 그 무엇도. 단지 현실에서든 꿈에서든 지금 이 순간을 유영하고 있을 뿐. 배수아 작가의 『뱀과 물』에 엮인 7편 안에서 그렇게 나는 오직 이 순간만을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p.94)으로 지냈다. 거기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는 어쩌면 어린 시절의 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품으면서. 그렇게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를 마주했다. 나는 그 아이를 나의 일부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믿으면서. 그러니까 그 아이는 곧 나인 거라고, 그 아이가 있음으로 해서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이제 그것이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그저 탈주하는 시공간..
푸른 들판을 걷다 | 클레어 키건 | 다산책방 만연한 푸른빛의 슬픔 위에 그려내는 우리가 잃어버린 기회들, 우리가 구해야 할 대답들   지난한 삶에도 엄연하게 맞이하는 결정적 순간은 있다. 비록 의도하지 않았거나 그 시작은 작고 미미했을지라도 혹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인생의 향방을 바꾸어 놓는 전환점과도 같은 순간 말이다. 그때에 누군가는 비로소 붙들려 있던 것으로부터 놓여나기도 하는 반면 오랜 시간 슬퍼하고 후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수도 있다. 그렇게 저마다 푸른 들판을 걷듯 제 삶을 묵묵히 걸어 나간다.클레어 키건의 초기 단편들을 엮은 『푸른 들판을 걷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그 결정적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들이 사로잡혔던 생각과 감정들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닐진대, 이는 곧 각자가 마주하..
경성 맛집 산책 | 박현수 | 한겨레출판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식민지 시대 경성에서 성업 중이던 10곳의 식당을 살핀다. 위치에 따라 본정의 청목당과 미쓰코시백화점 식당, 화월과 가네보 프루츠팔러, 종로의 화신백화점 식당과 이문식당 그리고 동양루, 장곡청전의 조선호텔 식당과 낙랑파라, 황금정의 아서원이 그것. 저마다의 특색 있는 맛과 멋으로 사랑받았던 곳이었는데,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 — 특히 한국 근현대 소설에 등장하여 묘사된 장면 — 을 통해 이 시기의 외식 풍경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번화한 경성의 한복판을 거닐며 맛집 탐방의 기회를 선사하고 있으므로. 다만 식민지 조선의 그늘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씁쓸함은 있다.     식민지의 식탁 | 박현수 | ..
소중한 보물들 | 이해인 | 김영사 언제나 동그란 마음으로 60년간 간직한 이야기   이해인 수녀의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을 만나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왔을 때, 내 마음은 한없이 열없어졌다. 첫말의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건네는 물음이 비로소 나를 깨웠던 것이다. 이 계절의 혹독한 더위를 핑계 삼아 한껏 뾰족해졌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이었으므로. 당장의 불평불만에 매몰돼 감사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가 있음을, 그런 까닭에 이미 손안에 쥔 소중한 보물은 알아보지 못한 채 손에 잡히지 않는 헛된 것을 탐하고 있는 스스로를 마주하게 했으므로. 이제 “순간순간을 보물로 만들며 살고 싶”(p.10)다 하신 수녀님의 뜻깊은 이야기들 안에서 여태껏의 모습을 반성하며 다시금 다짐도 해본다. 내 안의 소중한 보물들에 감사하자고, 더..
이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 문학동네 서로 만나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애틋한 접촉 그림과 비밀, 그리고 슬픔으로 밀착되는 세 아이의 이야기  지우는 자신을 찾는 채운과 소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차창 밖 눈발을 응시하다가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p.244) 하필 그 순간 그 구절이 떠오른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던 지난한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때에 비로소 떠올린 구절이므로. 그런데 어쩌면 선호 아저씨의 트럭에 올라 타 채운과 소리가 있는 원래의 자리로 향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 그 전환의 순간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일 수도 있으리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맺을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