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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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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모든 생(生)은 감동이다! 소설가가 된 ‘나’(루시 바턴)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이켜본다. 그 시작은 1980년대 중반, 9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욕에서 가정을 꾸린 때였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남편을 대신해 상당 기간 연락을 하고 있지 않던 엄마의 병간호를 받아야 했던 상황이었다. 자연히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 안에서 그 시절 가족들과 앰개시라는 작은 시골 마을 그리고 이웃들… 소소한 행복이 있기도 했지만 지독히 벗어나고 싶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알알이 살아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기면서도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
그러나 나는 내가 꽤 마음에 듭니다 | 이지은 | 스튜디오오드리 하루는 망했어도 여전히 멋진 당신에게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그 밤, 누군가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면 꼭 이 책에 쓰인 문장들과 같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문장 안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Happy birthday to me」 너는 네가 참 안됐대. 세상의 여분이라서. 무언가 네 몫이다가도 곧잘 잃어버려서. 유일하나 반짝이지 못해서. 운이라고는 신호등 타이밍뿐이어서. 때로는 변명할 기회 없는 미움을 받고 흔한 사랑은 오아시스처럼 멀어서. 나는 알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조용히 바쁘던 너의 날들을. 네가 욕심이라 이름 붙인 크고 작은, 사실은, 꿈들을. 잊은 척 절대 잊지 않은 것들을. 예컨대 사랑 같은. 네가 알기를 바라. 모든 반짝임은 가뭇없이 사라져가며 네 유일함은 그 공백 속에서라도..
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 민음사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희생된 순수한 소년의 비극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짓밟는 제도와 교육에 대한 비판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총명했고, 그런 까닭에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재능 있는 아이라면 의례히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을 향해 내디뎠다. 그것은 곧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는 일이었는데, 입학의 기쁨과 밝은 장래에 대한 설렘도 잠시, 신학교 생활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삶을 전복시킨다. 결국 신경쇠약 증세로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더는 주위에서 격려하던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그 파국의 여정을 좇으며 수레바퀴 아래서 있던 젊은 영혼을 다시금 떠올려본다. 물론 어느 누구도 한스가 잘못되기를 ..
두부 | 박완서 | 창비 박완서 산문집 스물세 편의 글을 모두 읽고서 책 정보를 살펴보니 초판 시기는 2002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하고도 일 년 전이 되고, 여기 엮인 산문들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95년부터 쓰인 것을 엮었으니 삼십 년을 향해 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글을 읽는 나로서는 강산도 세 번 바뀔 그 물리적 시간의 흐름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문장 안에서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는 박완서 작가를 마주했다. 그것은 곧 세상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그 끝에는 — 단박에 우리의 눈을 홀리는 빛나고 화려한 것이 아니라, — 저 밑의 하찮고 소박해서 쉬이 업신여겨지거나 지나칠 법한 것에 진득하게 머무르며 그 작은 것들에 목소리를 보태는 따스함이지 않았을까. 더욱이 삶의 희로애락, 그 모든 순간을 통과..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 시공사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나 감정 따위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골몰하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이 마음을 더없이 잘 설명할 단어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품고서 말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에서 소개하고 있는 단어들은 낯설지만 적당한 단어를 찾아 헤매던 우리의 마음을 번뜩이게 해 소중하게 다가온다. 나아가 각기 단어들이 품고 있는 의미가 언어의 벽을 넘어 저마다의 가슴속에 슬며시 와닿는 순간을 고대하게도 만든다. 덕분에 마음을 표현하고 전할 수 있는 초면인 단어들과의 만남 안에서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온 마음을 다하면 결과도 좋을 것입니다. ‘메라키’라는 개념은, 그리스인들의 사려 깊은 열정과 작은 것들에 감사하는 그들의 문화..
지극히 낮으신 | 크리스티앙 보뱅 | 1984BOOKS 하느님을 노래한 음유 시인이자 가난한 이들의 친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충만한 사랑으로 이르기 위한 삶의 여정 가운데 기쁨을 소망한다. 그것이 곧 진리인 연유다. 높은 곳 아닌 낮은 곳에 있고, 충족 아닌 결핍에 있는 그 진리를 성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내려놓고 가난을 받아들인다.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 가난한 자이기를 꿈꾼다. 지극히 높으신 분만을 바라보던 두 눈과 마음의 상태는 지극히 낮으신 분으로 향하였다. 그러고는 세상사 모든 질문의 답변 역시 성서가 아닌 성서를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음을, “몸과 정신과 영혼으로 느끼는 것”(p.16)임을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그리하여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으니..
나의 작은 산양 | 쉐타오(글)∙왕샤오샤오(그림) | 책과이음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숱한 날들의 기쁨과 아픔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아기 산양과 함께한 나날에 대한 글과 그림이다. 그 유년의 따뜻했던 경험 안에서 아기 산양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순간이지만, 그걸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은 영원할 수 있”(p.53)다는 것에 대하여. 더불어 그때에 “아기 산양이 비로소 눈물을 멈추고 웃어 보였”(p.53)던 것 역시 떠올린다.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을 나누었던 일은 이제 과거의 저편으로 흘러가 버렸지만, 서로에게 보인 진심만은 가슴속에 그대로 살아남아 있으리란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기도 하면서. 이 한 편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 안에서 만남과 이별, 사랑과 우정, 이를 통한 성장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들판의 기분은 좋..
너무나 많은 여름이 | 김연수 | 레제 이 삶은, 오직 꿈의 눈으로 바라볼 때 오롯하게 우리의 삶이 된다 김연수 작가가 낭독회를 위하여 쓴 스무 편의 짧은 이야기를 엮은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나는 “그들이 낮 동안 열심히 일해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밤의 사람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내게 하는 것. 나는 그들이 모여서 듣는 내 이야기도 그런 것이 됐으면 싶었다”(p.297)는 소망을 담은 이야기들 안에서 우리가 걸어온 시간, 그리고 마주해 나가야 할 시간들에 대해 한참을 서성였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시기를 경험한 뒤의 일이기도 해서 보다 의미가 있었는데,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바로 그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p.298) 고도했던 작가의 말 역시 같은 맥락이었으리라 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