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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쉼 없는 열정으로
정신적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헤세의 자전적 소설
어느 여름날에 화가 클링조어는 직감한다. “이미 힘은 많이 소진되었고, (…) 삶은 많은 피를 흘렸다”(p.11)는 것을.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최후의 작품을 완성하고자 마지막 남은 생명을 불태우기로 한다.
문득 죽음 앞의 한 인간을 떠올려본다. 생(生)을 향한 욕구에 비례하는 고통이 그를 장악하고 있으리라. 그것은 인간 존재라면 어느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의 순간일 것이므로 하등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클링조어를 통해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그때를 맞이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으리라. 그는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몰락을 믿는다고 했다. 그렇게 예정된 순간을 통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곧, 현 세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자유 의지를 명확히 한 것으로도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붓놀림으로 최고의 걸작을 그려냄으로써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헤르만 헤세의 감각적인 문체 안에서 “끔찍하긴 하지만 아주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p.90) 클링조어의 자화상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어쩌면 그 초상화의 인물은 생의 고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승화하고 있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며.
아, 아직 작업을 할 수 있다,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완숙한 여름날의 매혹적인 마지막 십오 분! 온 누리 곳곳에 신이 계신 듯, 지금 모든 것이 얼마나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아름다운가, 이 얼마나 고요하며, 이 얼마나 멋지고 아낌없는 은총인가! - p.74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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