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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 김애란 | 문학동네 서로 만나지 않고도 이루어지는 애틋한 접촉 그림과 비밀, 그리고 슬픔으로 밀착되는 세 아이의 이야기  지우는 자신을 찾는 채운과 소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차창 밖 눈발을 응시하다가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꿈에서 나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왔다.”(p.244) 하필 그 순간 그 구절이 떠오른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던 지난한 이야기를 끝내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때에 비로소 떠올린 구절이므로. 그런데 어쩌면 선호 아저씨의 트럭에 올라 타 채운과 소리가 있는 원래의 자리로 향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 그 전환의 순간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일 수도 있으리라.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맺을 수 있..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 | 마리나 반 주일렌 | FIKA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중용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저마다의 노력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세간의 기준에 매몰된 나머지 맹목적으로 성공만을 좇는 것이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으리라. 자칫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느라 정작 삶의 주인공인 자기 자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그런 자신을 평가하는 사회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마는 주객전도의 삶을 사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연유다.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의 저자는 자신이 걸어온 삶을 반추하며, 평범하여 외려 찬란한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란, 헛된 야망의 실현이나 비겁한 타협이 아니라 타인을 다른 시선으로..
꿈에 대하여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감촉마저 느껴질 정도로 컬러풀하고 리얼한  꿈에 대한 이야기 24편   때로 지난밤 꿈은 헛웃음이 날 정도로 허무맹랑하기도 하지만, 절묘하게 들어맞기도 해서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럴 때면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신통한 꿈의 신비에 대하여.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풀어놓은 꿈에 대한 이야기들 역시 그와 맥락을 함께 한다. 더욱이 입때껏 소설 안에서 즐겨 묘사해 온 꿈의 장면들에 근간한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과도 맞닿은 야기들이기도 해서 한층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아름다운 저녁 시간, 밀라노의 거리거리가 꿈처럼 어둠에 녹아들기 직전이었습니다. “나는 이 시간에 언제나 샴페인을 마셔. 낮과 밤의 경계선에.” 그녀는 그렇게 말했죠. “그러면 에너지가 솟아오르거든.” 그 말을 듣고 나서 ..
아이가 없는 집 | 알렉스 안도릴 | 필름 빽빽한 나무가 집어삼킨 듯한 만하임 저택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재벌가의 충격적인 미스터리   사건은 만하임 그룹을 이끌고 있는 페르 귄터 모트가 자신의 휴대폰 속에서 의문의 시체 사진을 발견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건 의뢰를 받은 스타르크 탐정 사무소의 율리아는 전남편이자 현직 경찰인 시드니와 함께 페르 귄터의 저택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만하임 가의 사람들을 하나 둘 마주하면서 오랜 시간 감춰져 온 재벌가의 비밀과 그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 나간다. 그 가운데 단연 최고의 장면은 사건의 전모를 알아낸 탐정 율리아가 만하임 가의 사람들을 붉은 방으로 한데 모이게 하는 순간이리라. 이는 — 적어도 겉으로는 — 모두가 바랐던 진실의 순간에 다다랐음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서 페르 귄터..
적산가옥의 유령 | 조예은 | 현대문학 오랜 시간 피와 비명을, 비밀과 불을 머금고 버티며 살아 있는 집! 4대에 걸친 적산가옥에 감춰진 괴기한 수수께끼들   적산가옥을 둘러싸고 시대를 넘어 두 사건이 맞물린다. 그 시작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였지만, 이제 막 외증조모에게서 적산가옥을 물려받은 운주는 남편과 함께 이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채에 대한 생전 외증조모의 아리송한 말과 그녀의 기이한 죽음의 비밀에 가까워지면서 차츰 감춰졌던 진실에 가닿게 된다.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먼저 무너뜨리지 않는 한 집은 누군가의 삶을 담으며 존재한다.”    - p.10   이제 적산가옥..
빈방 | 박완서 | 열림원 영혼의 신비로부터 시작된 노년의 진실한 고백 그리운 작가가 열어둔 마음속 빈방으로의 초대   박완서 작가가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의 지면을 빌려 연재한 복음 묵상을 엮은 책이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또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그 진솔한 이야기들 안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것은 진심으로 하느님 곁에 가닿기를 소망하는 모두의 신앙고백이기도 한 연유리라.  새삼 묵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살면 살수록 인생이 고해 바다라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감이다. 바다가 공포스러운 것은 기상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허무의 심연, 불운의 암초, 불안의 노도, 절망의 농무, 자포자기의 격랑 또한 무수히 맞닥뜨려야 한다. 아직도 익사하거나 떠내려가지 않고..
푸르른 틈새 | 권여선 | 문학동네 1996년 출간된 작가의 등단작   미옥이 지나온 길을 따르며 그녀가 — 자신이 기억하고 감각하는 모든 것들 안에서 — 보았을 ‘푸르른 틈새’에 대해 떠올려 본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길 소망하는 저마다의 마음 안에도 깃든 것이리라 생각하므로. 물론 그 과정 안에서 그녀가 마주했던 거듭된 실패와 좌절은 뼈아픈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도망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부단히 탐색하고 실험하며 부딪혔던 그녀의 선택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쌓아온 시간의 궤적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p.309) 그녀 자신의 것이 되었음을 말이다.    설령 모든 것이 한층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 밖의 다른 것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시인 이병률이 써내려간 사랑의 기록   “사랑은 몇 발자국 제힘으로 걸어서 저마다의 고독 속으로 미미하게 연결될 것이다”(「그런 것처럼」) 하는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읽었다. 사랑은 그런 걸까 …… , 하다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과연 그러하다고 수긍하게 되는 순간까지. 그렇게 마음속에 조용히 스며들게 될 사랑의 기록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기록이 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던 내 마음속 사랑의 기억을 감각해 본다. 그것은 “오래 액자가 걸린 자리에 사각의 자국이 남겨져 있다”(「상실의 배」) 는 구절과 꼭 닮아 있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 기차역에서 울어본 적 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