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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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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잘 있습니다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오래 전하지 못한 안부를 전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사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p.15)'를 증명하기 위한 삶은 고되고 쓸쓸하다. 그래서 깊은 밤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한 잔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새벽 별을 헤아리기도 한다. 어느 긴 밤에는 좋아하는 편지지를 앞에 두고 상념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해가 밝으면 '어제까지의 풍경'일랑 뒤로 하고, 새 아침을 맞는다. 계속해서 감당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리고 모든 것에 잘 있다는 안부를 전한다. '삶'이란 길 위에 한 인간이 서 있고, 그가 거니는 발자취는 시가 된다. 그것은 '쓰려고 쓰는 것'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쓰는 시에 가깝다. 이를테면, 삶으로 쓰는 시(詩)랄 수 있다. 그 여정을 좇으면서, 자연스레 생의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 문학과지성사 유일무이해지는 동시에 비밀이 되는 것 시간이 자꾸 묻는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살아갈 날들에 대해. 나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자못 진지하게 골몰한다. 대답해 보려고 애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므로. 그런데 늘어놓는 말들이 쌓인데 쌓이고 또 쌓여서 어느새 거대한 산이 됐다. 한낮인데도 한낮 같지 않은, 그 산중 어딘가에 내가 있다. 검은 입에서 나온 말들에 갇혀서 어느 날은 타는 목마름에 물을 찾아 헤매다가, 다른 날에는 가려움증에 온몸을 베베 꼬다가, 또 어느 날에는 죽은 듯이 잠자코 있다가, 또 다른 날에는 메스꺼움에 헛구역질을 해 대다가. 스미는 빛의 양이 줄어드는 정도만큼씩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은 사이좋게 깊어간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내고 껍질을 벗는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비로소 '슬..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 문학과지성사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시계판 속 바늘은 1은 2를 향해, 2는 3을 향해…… 11은 12를 향해, 그리고 12는 다시 1을 향해, 끝없이 반복한다. 그것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되는 순간, 그 찰나에 품었을 나와 당신, 고독과 공허,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에 대한 시(詩)가 한데 모였다. 잘 지내시길, 이 세계의 모든 섬에서 고독에게 악수를 청한 잊혀갈 손이여 별의 창백한 빛이여 -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중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시계판의 굴레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할 운명들임을. 그러므로 그 숨이 붙어 있는 한, 어디로든 발걸음을 떼야만 하는 존재들임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인 것을. 그 앎이 지금 내 영혼..
빈 배처럼 텅 비어 |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병들고 아픈 시대에 대한 혹독한 예감 ‘살아 있음’에 대한 이토록 치열한 존재 증명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내 청춘의 시기를 함께 해준 그야말로 인생 시집이라고 여길 정도로 특별한 시집이다. 지금도 가끔씩 펼쳐보고 있을 정도로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서점 한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했던 그날이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책꽂이에서 꺼내어 무작위로 펼쳐진 페이지에서 처음 읽었던 시는 「꿈꿀 수 없는 날의 답답함」이었다. 오랜 궁리 끝에 일체의 불필요한 단어들은 제하고 오직 정제된 단어들로만 이루어진, 요샛말로 대단한 걸 크러쉬를 불러일으키는 시였다. '아 썅!'을 마음속으로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한 소화제 같은 시였달까.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어떤 의미에서..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이성복 시인이 1978,79년에 쓴 시를 묶어 1980년에 출간한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스쳐 지나가는 것,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의 마음이 요 몇 년 새 급격히 커졌다. 아마도 폴 오스터의 『타자기를 치켜세움』을 읽은 직후, 알게 모르게 그런 마음이 표면적으로 의식화 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정작 그땐 몰랐지만 사라지고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는 소중함과 조금 더 아껴줄 걸 싶은 안타까움,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헛헛함은 스쳐 지나갔음에 대한 자책으로 곧잘 연결됐기에 더 마음 쓰이고 아팠던 거라 생각한다. 우연히 스치는 질문 ----- 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 3 중에서 그 ..
이 시대의 사랑 |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최승자 시인의 첫 시집 일전에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으면서, 최승자라는 시인의 이름과 마주한 기억이 있다. 아쉽게도 그 시는 최승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日記』에 포함되어 있어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번에 내가 골라 든 『이 시대의 사랑』은 최승자의 첫 번째 시집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시들이지만, 이 시집에는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는 심오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세월이 흘러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 본연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건드리는 시들이어서 그럴까.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이 시대의 사랑 - 최승자 지음/문학과지성사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 문학과지성사 詩作 메모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1988.11) 비관이 난무하다 그것은 시대의 우울함이자, 상처 받은 청춘의 우울함이다 그럼에도 그는, 우울한 현실 속에서 망설이기보다 차라리 단호했다 그 단호함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감지하게 돼버린 순간, 심히 동요할 수밖에.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