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일상의 의미와 자유에 대해
심도 깊게 파고든 수작
사흘간의 휴가 동안 모래땅에 사는 곤충 채집에 나선 남자(니키 준페이). 그가 S역에서 내려 다다른 곳은 해안가 모래 언덕에 자리한 마을로, 어느 노인에 이끌려 한 여인의 집에서 신세 지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계략에 빠지고 만다. 그리하여 남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계속해서 날라와 쌓이는 모래를 끝없이 퍼 나르며 살아가고 있는 이 기묘한 마을이 자신을 더욱 교묘하게 속박하고 억압하고 있음에 분노하며 오직 탈출만을 꿈꾸는 나날을 보낸다.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p.19)를 따라 자신 역시도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한동안을 보내리라는 기대는 그렇게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후일 자신을 모래 구덩이 밖으로 꺼내 줄 유수 장치를 발견했을 때, 그는 정작 탈출하기를 미룬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처절한 몸부림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왕복표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족히 무마될 수 있었던 걸까. 책을 덮고도 한동안 그의 선택을 곱씹을 수밖에 없었는데, 어쩌면 안과 밖,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국 하나의 세계일 뿐이라는 이치를 - 모래 구덩이 감옥 안에서 - 비로소 깨우친 것이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더는 중요한 문제는 아닐 터이다. 그러므로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저 살아가는 일에만 몰두할 일이리라. 유동하는 모래처럼 어디서든, ‘모래의 눈으로 사물을 보’(p.95, 96)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p.9)
불현듯, 새벽빛 슬픔이 북받친다……. 서로 상처를 핥아 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납득이 안 갔어…… 어차피 인생이란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가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 - p.195, 196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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