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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세계의 끝 여자친구 | 김연수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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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읽기에 앞서, '작가의 말'을 읽었고, 다 읽고 나서 한 번 더 '작가의 말'을 읽어봤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에 회의적이라는 말, 대부분 다른 사람을 오해한다는 말,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한 때라는 말,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무심결에 읽어 나갔던 것들에서, 이후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고 말았다. 일상에서 내뱉었던 '네 마음을 알아, 널 이해해'라는 말의 무게가 새삼 견딜 수 없이 육중하게 느껴진 탓이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낼 당시의 나는 추호의 거짓 없는 진심을 말한 것이었다고 여태껏 생각해 왔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에 의문부호가 붙어버린 것이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쉽게 위로하지 않지만, 쉽게 절망하지도 않는… 그런 이들을, 그들의 삶을, 심오함을 담은 찰나를 통해 보인다. 그것이 작가가 말한 '불꽃에 대한 이야기'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기억할 만한 지나침」,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내겐 휴가가 필요해」,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달로 간 코미디언」을 차례로 읽어 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말,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는 말, 그것 자체만으로도 삶의 가치는 충분한 거라고 했던 그 말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차츰 선명하게 자리잡은 느낌이다.

 

인간이 사랑이란 걸 멈추지 않는 한, 상대를 위한 노력 역시 꾸준할 것이라는 진리. 그리고 그 노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타인에 대한 이해의 벽이 더이상 장애물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운다. 오히려 역으로 생각해 보면, 벽이 있기에 상대를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사랑이란 것을 보다 공고하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점이, 이런 희망이 우리의 삶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어느새 마음이 훈훈해졌다. 내가 읽은 『세계의 끝 여자친구』은 그런 책이었다.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 p.3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 검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모두 검은 바닷속으로 잠겨들었다. 출렁이는 바닷속에서는 전날 밤 욕조 속에서 들었던 밤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물속에 잠긴 그녀는 입을 벌리고 그 소리들을 맛보았다. 입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은 짜고도 압도적이었다. 순식간에 고통이 그녀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언제라도 그녀를 매혹시켰던 고통이었건만 맛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p.58, 59 「기억할 만한 지나침」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 p.81 「세계의 끝 여자친구」

 

(…) 때로 우리는 원래 만나기로 한 것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또 사랑에 빠지고, 코발트블루에서 역청빛으로 시시각각 어두워지는 광활한 밤하늘 속으로 머리를 불쑥 밀어넣는 것과 같은 황홀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이 도시와 청춘의 우리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리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극한의 절망과 다른 선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완강하고도 그만큼 멍청한 확신 사이를 한없이 오가면서 그 무엇도 아닌 존재에서 이 세상 그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 시시각각 변하는, 그러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얼굴을 지녔지만, 결국 단 하나일 수밖에 없는 얼굴들. 그와 비슷하게 이 도시에서는 깊은 밤의 퇴근길 한강을 따라가면서 지친 얼굴로 바라보는 밤의 또렷한 풍경과 멀리 내몽고의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먼지로 뿌옇게 뒤덮인 낮의 풍경이 서로 다르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맞이하는 하루 1440개의 순간들은 모두 똑같이 아름다웠다. 60초든, 1,000분의 1초든, 모든 풍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하는 청춘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107, 108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 서른 살이 된다는 건 정말 그런 의미인 것일까?    - p.109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저는 외롭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고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쓸쓸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눈이 내리는 밤에 짖지 않는 개와 마찬가지로 저는……    - p.141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 (…) 도서관에는 그처럼 많은 책이 있으니, 그중에는 단 한 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았다.    - p. 170 「내겐 휴가가 필요해」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 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 p.198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제아무리 인생을 깊이 들여다본다 해도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불가항력적인 우연의 연속이다."    - p.221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결국 인생이란 리 선생의 공책들처럼 단 한 번 씌어지는 게 아니라 매순간 고쳐지는 것. 그러니까 인생을 논리적으로 회고할 수는 있어도 논리적으로 예견할 수는 없다는 것.    - p.224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우리는 하늘을 봤고 우리는 별을 봤고 우리는 바다를 봤지.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자신이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너는 너만을 이해했을 뿐이야. 음식을 맛볼 때, 너는 차이를 맛보는 거지, 그 미각을 맛보는 게 아닐 수도 있어."    - p.225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 p.237 「달로 간 코미디언」

 

 

 

 

 

세계의 끝 여자친구 - 10점
김연수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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