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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6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앨리스 먼로 | 뿔(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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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감미롭고도 강렬한 문장으로 그려낸 이 시대 모든 사랑의 풍경
평범한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 기쁨과 절망을 노래하는 다섯 빛깔 이야기

 

 

 

삶을 향한 깊이있는 이해가 돋보인다. 일상 안에서 한번쯤 겪기 마련인 어떤 생각, 어떤 감정의 찰나를 하나의 예시처럼 적절한 상황 속의 등장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식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 화자들은 하나같이 우리 주변 어디에서 마주하더라도 낯설지 않은 이들이고, 그들의 삶 역시 일상의 범주 안에서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면, 때론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당황하기도 하며, 시시때때로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선택의 결과를 두고 안도와 후회를 거듭하기도 하는…, 나름의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안에서 그들은 희로애락의 어느 한 가지 감정으로만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중첩된 감정을 느끼기는 일도 왕왕 있어 보인다. 말하자면, 자칫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지만, 실상은 각자에게 주어진 엉킨 실타래를 풀기위해 부단히도 골몰하는 삶을 살아가는 셈인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이야기로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여태의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참고로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표제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비롯해 「물 위의 다리」, 「어머니의 가구」, 「위안」, 「쐐기풀」, 「포스트앤드빔」, 「기억」, 「퀴니」, 「곰이 산을 넘어오다」의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새비서가 알려 준 놀이라고는 딱 하나, 종이에 남자 애 이름과 자기 이름을 적고는 서로 같은 철자를 지워버린 다음, 남은 글자 수에 맞춰 손가락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차례로 말하면서 세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 숫자에 딱 걸리는 단어가 그 남자 애와 나 사이의 운명이라면서.    - p.42, 43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 p.77, 78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한 시간 이상을 걷고 나서야 문을 연 가게를 발견했다. 나는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사 마셨다. 한 번 내렸다가 다시 데운 커피는 검고 써서 약 비슷한 맛이 났다. 딱 나한테 필요한 맛이었다. 마음은 이미 편안해져 있었지만, 이제는 행복감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혼자 있다는 사실이 주는 그런 행복감. 보도 위로 쏟아지는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과 그 위로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운, 이제 막 새잎이 돋아나는 가지들. 가게 뒤쪽에서 커피를 따라 준 직원이 듣고 있는 라디오의 야구 중계가 들려왔다. 앨프리다에 대해 나중에 쓰게 될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적어도 구체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이야기를 쓰는 일 못지않게 허공에서 뭔가를 움켜잡으려는 시도와도 같았다. 관중들의 외침이 슬픔으로 가득 찬 심장 박동처럼 내게 다가왔다.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기쁨이나 탄식의 소리들. 먼 곳에서 들려오는 그 사랑스러운, 형식적 소리의 파동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것, 내가 마음을 쏟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내 삶이 바로 그런 것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 p.162, 163 「어머니의 가구」

 

그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심연을 본 사람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끝 모를 심연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심연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 근처에도 가본 일이 없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그 모든 것을 함께 겪어냈다. 그 기억이 그들을 묶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두 사람을 영원히 갈라서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한평생을 하나로 묶을 수도 있는 법이다. 힘들게 그 밑바닥을 벗어났더라도 그들은 그 차고 텅 빈,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심연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터였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일들이 그렇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마치 이곳 혹은 저곳에서 한 번에 하나씩 특정한 누군가를 고르기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는 것이다. "공평하지 않아." 내가 말했다. 난 이런 제멋대로의, 인생을 다 망쳐버리는 악랄한 불운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다. 전쟁이나 지구의 재앙 같은 비극적인 시기가 아니라, 이런 평온한 시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건 더 나쁜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무 의도없이 한 행동이 홀로 그리고 영원히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니. 이건 정말 최악이었다. 그게 내가 말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물론 거기에는 '공정하지 않아. 그게 우리 사이와 무슨 관계가 있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자아의 내면에서 나온, 너무 거칠어서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런 거짓 없는 항변. 순진이라, 적어도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 한에서 말이다.    - p.249, 250 「쐐기풀」

 

음, 우리가 다시 만났더라도 옛날과 다른 뭔가가 시작되진 않았을 것이다. 혹 만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자리를 알고 있는, 드러낼 수 없는 사랑만이 제자리에서 달콤한 실개천이나 지하의 암반수처럼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 위를 덮은 이 새로운 정적과 봉인의 무게를 안은 채 그 어떤 모험도 무릅쓰지 않고.    - p.252, 253 「쐐기풀」

 

이미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 역시 선명하게 인식하자. 날이 가고 해가 갈테고, 비슷비슷한 감정들이 반복되겠지. (…) 이제 그녀, 혹은 그 누구라도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자신이 한 거래의 대가라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비밀스러운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전혀 없는 그런 삶의 전망. 이 삶에 집중하자. 그녀는 생각했다. 갑자기 무릎을 꿇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삶이 내가 가진 전부이다.    - p.294, 295 「포스트앤드빔」

 

그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삶을 더 좋아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다른 종류의 삶 역시 나름의 함정과 성공을 포함한 또하나의 탐구에 불과했으리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떠올랐다. (…) 다른 삶이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계속해서 같은 것만을 다시, 또다시 발견하게 되었을지도. 명백한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불안정한 자신에 대한 그런 진실들. 그녀가 자신에 대해 발견한 진실은 어떤 신중함, 최소한 경제적인 감정 통제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한평생 자신을 지배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 p.328 「기억」

 

피오나는 차츰 그에게 익숙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를 그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지속적인 방문객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의 옛날 구분에 따라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하는 손님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에게 형식적인 친절함을 유지했는데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가장 절실하고도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이 오십 년간이나 함께 산 남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 p.396 「곰이 산을 넘어오다」

 

 

 

앨리스 먼로의 글을 읽자면, 일상에서 다소간 힘을 잃었던 생(生)의 어떠한 기운에 다시금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기묘함을 느낀다. 이를 테면, 단조로움이나 밋밋함, 일률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일상성 안에서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는 삶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삶을 향한 이치에 대한 순응 곧, 순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일련의 과정 안에서 터득한 깨달음 즉, 지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점을 무섭도록 날카롭게 포착해 낸 그녀의 글들을 읽으면서, 매번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곤 한다.

 

혹여 정독을 했음에도 소설속의 모든 것이 평범하고 단조로우며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느껴진다면, 감히 생각건대 시기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해본다. 부디 그녀가 바라보는 삶을 향한 매혹적 시선을 당신도 발견할 수 있기를.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 10점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뿔(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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