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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2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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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나를 잊기 위해 떠나온 곳에서 
뜻밖에 나 자신이 선명해지는 감각

인생의 가장 예외적인 시간이 
나에게 남긴 모든 것

 

 

 

일상 아닌 곳으로 발걸음 하는 일이 내게는 정기적인 의례와도 같았다. 실상 그것은 외로운 일이었고 손톱만큼의 서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일말의 전환과 이를 위한 정신적 쉼을 갈구하던 나에게 그것은 감수할만한 값어치로 여겨졌다. 나 이외의 다른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고 내키는 대로 어디로든 내딛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이 삶이 오직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의 의지로만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안도의 작업이기도 했으니까. 거짓 없는 감정과 그에 따른 행위는 공간이 주는 낯섦 안에서 한층 유연하고도 대담해질 수 있었고, 그런 여유 있는 자신을 만나는 일이 퍽 근사하게 다가왔던 것 일수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은희경 작가의 뉴욕-여행자 소설 4부작 속 인물들 역시 그 속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매번 어딘가로 떠나길 바라는 건, 그와 같은 희망을 품은 이유가 클 테니까.

그러나 막상 떠나온 여행지에선 어떠했나 생각해보자.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장밋빛의 황홀경을 마주할 때도 더러 있기는 했지만, 도리어 유쾌하지 못한 어떤 상황, 그리하여 당혹스럽고 난처하기도한 순간들을 맞이하기도 했지 않았나. 그로 인해 하루의 기분을 망치기도 했고, 아주 의아스럽고 의뭉스러운 누군가의 면면에 몹시 당황하기도,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뉴욕-여행자 소설 4부작은 그와 같은 상황 속 심리를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나 역시도 마주한 적 있었던 익숙한 경험들을 제시한다. 각자 앞에 놓인 사정과 끌어안고 있는 과거의 기억은 다르지만 대개의 우리는 여행을 떠난 곳에서 일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롭고도 낯선 자신을 만나왔다는 생각을 해볼 때 소설 속 인물들이 마주한 감정들과 상황의 흐름, 그로 인한 모든 것이 놀랍도록 마음 깊숙이에 파고드는 것이다. 그리고 한층 진중하게 생각도록 만든다. 나 자신과 그 내면에 대하여. 낯선 공간은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훌륭한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대체적으로 쉬이 떨쳐내고 호기롭게 걸어 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확실히 낯선 공간의 힘이었으리라. 덕분에 믿을 것이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온전히 그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소설 속 인물들을, 그리고 나와 당신을 늘 어딘가로 향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01.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여기서 오래 혼자 살다보면 그냥 친절한 건지 특별한 감정인지 잘 구별 못하게 돼. 자기들끼리 선을 그어놓고 그 바깥에 있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좀 있거든.” 승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디 살든 다 마찬가지 같아.” 다음 순간 승아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말야. 왜 얼마 동안 어디에를 생각해봐. 거기에 대답만 잘하면 문을 통과할 수 있어.”    - p.75

#02. 장미의 이름은 장미 장미의 이름은 장미, 반찬의 이름은 반찬, 마마두의 이름은 마마두, 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해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작가 마마두가 나무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가서 뜨거운 소금을 검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푸른 하늘과 호수의 장밋빛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를 상상해본다. 누군가의 왜곡된 히스토리는 장밋빛으로 시작한다.    - p.135

#03.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그럼에도 현주는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채로 주어진 관성에 끌려다녔다. 의심을 하면서도 눈앞의 경로를 향해 계속 걸었고, 그러다보면 너무 멀리 와버려서 그 길이 맞는다고 믿는 데에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 p.150

#04. 아가씨 유정도 하지 내 입에서는 문득 어머니가 하듯이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춤춰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나는 머릿속으로 혼잣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현재에 살아야지. 지금 나에게는 누군가와 다시 와보고 싶은 장소가 생겼어.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계속해서 새 친구를 사귀겠지.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놀면서. 눈이 더 빠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눈발을 뚫고 어머니 쪽으로 걸어갔다. 미친듯이 퍼붓는 눈의 율동 때문에 온 세상이 들썩거리는 것 같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흔들려 마치 정말로 춤을 추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가 부른 노래의 후렴 부분은 내 귀에도 익은 가락이었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 나는 퍼붓는 눈을 맞으며 그 음률에 맞춰 춤을 추듯이 한 발 한 발 어머니에게로 다가갔다.    - p.248, 249

 

 

 

 

 

장미의 이름은 장미 - 6점
은희경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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