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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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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 이제니 | 문학과지성사 무한을 보고 싶다 분주했다. 여기서 출발했지만 저기서 그칠 것이란 생각을 조금씩 지워가면서 계속적으로 나아가야 했으므로. 내심 기대했던 걸까. “빛보다 빠른 오늘의 너에게”(p.7)라는 그 말을. 헤매었다. 믿어 의심치 않던 것마저 나의 의식을 흔들었기에. 그 흔들림 안에서 기린과 그린, 가지와 앵무, 달과 부엉이, 꽃과 재, 나무의 나무…… 끝없이 계속되는 낱말들이 가지는 의미를 되새김질해 본다. 정녕 알고 있다고 여겼던 그 뜻이 맞느냐고. 점진적으로 속도가 붙는 리듬 안에서 그렇게 자문하며 나는 향해가고 있었다. “무한을 보고 싶다”던 시인의 바람을 곁눈질하며. 매일매일 슬픈 것을 본다. 매일매일 얼굴을 씻는다.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 문학과지성사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사랑을 생각한다. 만남과 이별 사이, 삶의 희열이 충만했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머지않아 폭풍이 밀려오고 장대비가 쏟아졌던 그 여름을 생각한다. 그 계절, 한복판의 나를 생각한다. 그 여름의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p.117 「그 여름의 끝」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지음/문학과지성사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진은영 | 문학과지성사 그러니까 시는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는 시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시인은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에 그러니까 시를 썼다. 이 땅에서 목도한 슬픔과 절망 그로 인한 고통을 지그시 참고 견디며 함께 이겨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를 썼다. 그런 까닭에 시들이 나를, 우리를 깨운다. 함께 애써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마주 잡은 두 손으로 훼손당한 것을 보듬고 끌어안아야 한다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그러니까 시는, 진은영 시인의 시는 그렇게 나를 흔들었다. 우리가 절망의 아교로 밤하늘에 붙인 별 그래, 죽은 아이들 얼굴 우수수 떨어졌다 어머니의 심장에, 단 하나의 검은 섬에 그러니까 시는 제법 볼륨이 있는 분노, 그게 나다! 수백 겹의 종이 호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 문학과지성사 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뻗어나가는 말에 주저함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는대로 주절대 듯 거침없이 쏟아낸 단어와 문장은 하나의 시가 되었고, 마흔네 편의 시는 하나의 시집으로 엮였다. 화두는 곡두.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을 의미하는 단어. …그런 것들, 그러니까 실상은 없는데 있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란 말…. 가 닿고 싶은 마음에 허공인 줄 알면서도 손을 휘이 젓고 마는 시인의 언어를, 어두운 밤 희미하게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그렇게 기웃대다가 어쩌면 시인이 - 구태여 말하자면 일상을 깊이 파고드는 생활 밀착형 랩을 구사하는 - 래퍼일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결론……. 없음, 없음, 없는데..
찬란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시집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찬란’이라는 두 글자 단어가 계속적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것에 스민 옅은 슬픔 탓이었는데, 여태껏 내가 알아 온 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까닭이기도 했다. 온통 환하게 비추어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밝은 아름다움을 수놓으리라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서, 어느 모로 보나 슬픔과는 도통 어울릴 법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살고자 애쓰는 이들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떤 감정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하여 살아 있다는 것, 그로 인한 경이는 –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든 -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한 것이라고. 살아 숨 쉬고 있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든 필연적 순간들이 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 문학과지성사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계절의 흐름 안에서 묻는 안부가 사려 깊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p.11) 말하는 소박한 바람과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p.49)다는 에두른 인사가 너른 마음 씀씀이를 가늠케 한다. ‘가을에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고 믿는’(p.64) ‘나’는 섣달의 어느 날,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p.83) 생각에 며칠간 뜸했던 부엌으로 향하며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 조심스러운 한마디, 과장하지 않는 몸짓 하나하나는 사소한 듯 하나 더없이 살뜰하기만 하다.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든 마음, 조금 보태어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지는 기분이 든다. 그 대상을 찾아 ..
눈사람 여관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불가능한 슬픔을 쥐고 아낌없는 혼자가 되는 시간, 세상의 나머지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세상에 나 혼자 우두커니 있음을 두려워하던 나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 눈앞의 어둠이 전부여서 그 자리에 웅크리고 가만히, 그 어둠들을 삼키고만 있었다. 그렇게 어느 골방에서 한탄하며 무기력하게 표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 순간을 외려 소중하게 보냈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한층 또렷하게 갈망하던 그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를 다지고, 주변을 살폈어야 했다. 그러나 한참은 모자란 존재여서 무력하기만 했다. 문득 그때 이병률 시인의 시집 『눈사람 여관』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외로움과 결부되어 있는 이 생을 ..
즐거운 일기 |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방법적 비극, 그리고 ―――― 최승자의 시 세계 이따금 최승자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첫 시집이었던 『이 시대의 사랑』의 시들이 그랬다. 온통 비극뿐인 세계 안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 분노하고 발악하며 때론 냉소적으로 ― 강단 있게 맞서 나가는 모습에서 묘한 힘을 얻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뇌리에 박힌 이래로 쭉 그래 왔다. 작년에 펴낸 『빈 배처럼 텅 비어』의 시들도 곱씹어 읽어 보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초탈한 인간보다는 사투하는 인간형이 더 매력적이고 훨씬 끌렸으므로 첫 시집에 유독 손이 갔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1984년 발간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를 펼쳐 보았다. 역시나 시인의 젊은날에 쓰인 시들은 최근작에 비해 한층 호기롭게 절망을 마주한다. 비극의 절정에서 한결 빛을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