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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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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하고 행복한 타피오카의 꿈 | 요시모토 바나나(글)∙수피 탕(그림) | 한겨레출판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처럼 포근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그림 에세이 남녀가 만나 연인이 되고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 거듭된 과정 안에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단연코 사랑의 힘이었으리라. 요시모토 바나나가 글 쓰고 수피 탕이 그린 그림 안에서 그것을 새삼 깨닫는다. 지난날 아픈 엄마를 대신해 장을 보고 밥을 해주던 아빠의 모습은 그때 자주 해주셨던 진한 된장국의 맛으로 남아 있다. 후일 성인이 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도마 앞에 서면 그 시절 아빠가 알려주었던 무 써는 방법을 떠올리며 자연스레 아빠를 추억한다. 한편 자신이 온 세상인 것처럼 꼭 붙어 있던 아이가 훌쩍 성장해 가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대견해하기도 하는데, 그러면서도 어릴..
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바나나 열풍을 일으킨 일본 신세대 문학의 신화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할머니를 영영 떠나보낸 미카게는 걷잡을 수 없이 널뛰는 감정들에 곤혹스러워하며 신에게 빈다. “아무쪼록 살아갈 수 있도록.”(p.50) 그러나 그 기도는 사실 자신을 향한 주문이고 다짐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 순간에 그녀가 텅 빈 집이 아니라 유이치와 에리코 씨가 있는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는 게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분명 상심의 고통 속에서도 적잖은 안도가 됐으리라. 떠나간 이에 대한 극심한 슬픔을 견뎌야 하는 것은 오직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곁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필시 위로가 됐을 것이니 말이다. 후일,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빠였다가 엄마가 된 에리코 씨를 떠나보냈을 때의 유이치 역시 미카게의 존재가..
새들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새가 너에게 무언가를 전하러 왔다면, 그건 엄마가 보내는 영원한 메시지야.” ‘조금은 불완전했지만, 흔들림 없이 함께였고, 즐거웠’(p.58)던 가족, 그러나 이제 남은 사람은 마코와 사가 단둘뿐이다. 다카마쓰 씨를 잃고, 사가의 엄마, 마코의 엄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이만이 오도카니 이 세계에 남겨진 것이다.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한 여린 아이들이 감당해야만 했을 슬픔의 크기, 앞날의 막막함이 어땠을는지 가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 일은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대학생인 마코는 배우로서 연극 무대에 서는 것으로, 사가는 빵을 만드는 일을 해나감으로써 각자의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면서도 쉬이 떨쳐버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서로가 있기에 버텨낼 수 있었..
주주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맛있는 햄버그 속에는 누구도 만질 수 없는 기적의 공간이 있다." 오랜만에 읽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언제나처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게 한다. 이야기에 깃든 치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햄버그 스테이크 가게 ‘주주’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도우면서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 노력은 착실하게 쌓여 지난날의 상처를 조금씩 아물게 하고 새 살도 오르게 한다. 흔히 이 일련의 과정을 두고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라는 문장 안에서 이해하곤 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삶의 민낯을 확인하는 일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떠넘길 수 없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온전하게 감당해야 할 시련의 몫이 늘 우리 곁..
바다의 뚜껑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여기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빙수 가게 요시모토 바나나가 보내는 눈부신 한여름의 풍경 마리와 하지메가 꾸려 가는 두 평 남짓의 조그만 빙수 가게. 에어컨도 없는 어둡고 비좁은 공간이지만, 이곳은 단순히 얼음을 갈아 팔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그녀들의 꿈이 비로소 시작되고, 실현돼 가는 공간인 것이다. 마리는 지난 여름, 남쪽 섬 여행에서 들렀던 빙수 가게에서의 황홀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달콤 시원했던 빙수의 맛은 물론, 가게 뒤로 펼쳐진 망고스틴 가로수길과 그 끝에 자리한 바다를 포함한 모든 것을. 그래서 다니던 도쿄 단기 미술 대학을 졸업하자, 고향 니시이즈 - 마음이 늘 돌아가는 곳 - 의 바다가 보이는 솔숲 중간에 빙수 가게를 연다. 그 여름, 하지메는 오랜시간 의지하던 할머니를 떠나 보..
티티새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츠구미 마리아의 시선에서 그려지고 있지만, 『티티새』는 어디까지나 츠구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역시나 작가의 말을 보면, 상당 부분 츠구미가 작가 자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형상화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티티새』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츠구미는 정말이지, 밉살스러운 여자애였다." - p.7 하지만 츠구미를 미워할 수만은 없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해 언제나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는 그녀지만, 그것 자체에 대한 맹목적인 불안감 따위는 없다. 오히려 뒤로 숨지 않고, 조금은 제멋대로더라도 솔직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츠구미가 외려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마리아 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면서 성장한다. 그리..
하드보일드 하드 럭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어둠에서 빛으로, 겨울에서 여름으로 지난해 두 분 할머니를 갑작스레 보내 드리면서 이별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더 눈길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하드보일드」와 「하드 럭」 이렇게 두 편의 이야기가 담겼는데, 모두 가까이 있던 이의 죽음을 소재 삼고 있다. 흔히들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하지만, 소중했던 이를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보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어떤 마음으로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렸을까, 생각하며 읽다 보니 묘하게 수긍 가며 마음에 와닿는 말들이 제법 있어서 아끼며 읽어 보았다. # 01. 「하드보일드」 일전에 미치 앨봄의 『도르와 함께한 인생여행』을 읽으며 내가 느끼고 다짐했던 것과 놀라울 만큼 비슷한 구절이 있어서, 반가운..
도토리 자매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함께하는 순간, 사소한 사건도 따스한 이야기가 된다 등장인물인 언니와 나의 이름은 돈코와 구리코다. 그래서 도토리(돈구리) 자매. 도토리는 매끈하고 차갑고 행복한 감촉이었다. 그 어떤 사소한 것도 의미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이어가게 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웠던 보석 같은 책이었다. 살아 있음의 기쁨을 만끽하며 지내야지. 지금까지 다소 충격을 받은 경험은 있지만, 내 영혼의 심지는 짓눌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조금 이상해졌다 해도, 거기에 집착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상처도 아물고 또 어디서든 행복이 쏙쏙 생겨난다. 그것은 아마도 생명력과 같은 것이리라. - p. 55 즐거우니까 살아가자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다만 몸이, 본능이 살아가자고 하니까, 오직 살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