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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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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한 장처럼 | 이해인 | 샘터사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을 위한 이해인 수녀의 시 편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이해인 수녀의 시 편지가 가슴 한 구석의 시린 마음을 달래준다. 특히나 이번에 발간된 『꽃잎 한 장처럼』은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당연하게 누리던 일상의 많은 것들을 잃게 된 우리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희망의 목소리여서 한층 귀하게 다가온다. 생각해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알게 모르게 마음속 그늘이 깊게 드리워지고 있다고 실감하는 일이 왕왕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활기차게 지내고자 마음먹으면서도, 뒤돌아서면 작은 일에도 쉬이 불평하고 불안해했던 것이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견뎌낼 수 있는 인내의 자세가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수녀님의 시와 글이 ..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 김민정 | 문학과지성사 화두는 곡두 그러나 사랑은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뻗어나가는 말에 주저함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되는대로 주절대 듯 거침없이 쏟아낸 단어와 문장은 하나의 시가 되었고, 마흔네 편의 시는 하나의 시집으로 엮였다. 화두는 곡두.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을 의미하는 단어. …그런 것들, 그러니까 실상은 없는데 있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란 말…. 가 닿고 싶은 마음에 허공인 줄 알면서도 손을 휘이 젓고 마는 시인의 언어를, 어두운 밤 희미하게 비추는 달빛에 의지해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조심스레 따라가 본다. 그렇게 기웃대다가 어쩌면 시인이 - 구태여 말하자면 일상을 깊이 파고드는 생활 밀착형 랩을 구사하는 - 래퍼일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결론……. 없음, 없음, 없는데..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 이병률 | 문학동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집이 비어 있으니 며칠 지내다 가세요’라 건네는 시인의 첫말이 포근하게 다가오는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바다는 왼쪽 방향이고 슬픔은 집 뒤편에 있’다고 덧붙인 말 안에 스민 지극한 배려가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애써 외면하고 또 그런 식으로 잊으려 했던 나의 슬픔을 가만히 응시하게 한다. 살피고 보듬게 만든다. 그야말로 시집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온화한 집이 되어준 셈이다. ‘그 집에 살다 가세요’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산란했던 마음이 한결 놓이고 말았으니까. 삶에 짊어진 슬픔을 시인이 창조해 낸 시적 언어 안에서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놀랍고도 멋진 일인지 새삼 감탄하면서. 이 생에서는 실컷 슬픔을 상대하고 단 한 줄로..
찬란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시집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찬란’이라는 두 글자 단어가 계속적으로 나를 흔들었다. 그것에 스민 옅은 슬픔 탓이었는데, 여태껏 내가 알아 온 것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 까닭이기도 했다. 온통 환하게 비추어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밝은 아름다움을 수놓으리라는 어떤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어서, 어느 모로 보나 슬픔과는 도통 어울릴 법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것은 진정으로 살고자 애쓰는 이들만이 맞닥뜨릴 수 있는 어떤 감정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리하여 살아 있다는 것, 그로 인한 경이는 –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든 -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한 것이라고. 살아 숨 쉬고 있기에 마주할 수밖에 없는 모든 필연적 순간들이 한..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 문학과지성사 어떤 빚은 빛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계절의 흐름 안에서 묻는 안부가 사려 깊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 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p.11) 말하는 소박한 바람과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p.49)다는 에두른 인사가 너른 마음 씀씀이를 가늠케 한다. ‘가을에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고 믿는’(p.64) ‘나’는 섣달의 어느 날, ‘영아가 오면 뜨거운 밥을 새로 지어 먹일’(p.83) 생각에 며칠간 뜸했던 부엌으로 향하며 ‘너’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 조심스러운 한마디, 과장하지 않는 몸짓 하나하나는 사소한 듯 하나 더없이 살뜰하기만 하다.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든 마음, 조금 보태어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어 지는 기분이 든다. 그 대상을 찾아 ..
눈사람 여관 | 이병률 | 문학과지성사 불가능한 슬픔을 쥐고 아낌없는 혼자가 되는 시간, 세상의 나머지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되는 순간 세상에 나 혼자 우두커니 있음을 두려워하던 나날이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었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내 눈앞의 어둠이 전부여서 그 자리에 웅크리고 가만히, 그 어둠들을 삼키고만 있었다. 그렇게 어느 골방에서 한탄하며 무기력하게 표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그 순간을 외려 소중하게 보냈어야 했다. 어둠 속에서 한층 또렷하게 갈망하던 그 무언가를 위해 스스로를 다지고, 주변을 살폈어야 했다. 그러나 한참은 모자란 존재여서 무력하기만 했다. 문득 그때 이병률 시인의 시집 『눈사람 여관』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외로움과 결부되어 있는 이 생을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 알에이치코리아 “내 詩가 여러분에게는 ‘위로’의 언어이기를, 내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기를 소원합니다.” 날이 춥다는 핑계로 겨우내 걸렀던 산책을 나갔다. 사월 첫날의 얘기다. 아침 공기는 선선했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들 정도는 아니라서 오히려 상쾌했다. 작년 봄과 여름, 가을을 보내면서 한 번씩 거닐었던 시간들이 나에게는 소확행(小確幸)을 가져다준 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기에, 조금 더 이불 안에서 머물고 싶은 한 켠의 마음을 뒤로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적고 나니, 뭐 대단한 산책이라도 하는 양 들리기도 해서 열없긴 한데, 정말 별 게 없긴 하다. 뒷산의 흙길을 한 시간 남짓 거닐다가 볕이 좋은 벤치에 앉아 책을 넘기다 오는 일이 전부니까. 그런데 그 짧은 시간이 생각 이상으로 기분을 맑게 한다. 평소 같..
즐거운 일기 | 최승자 | 문학과지성사 방법적 비극, 그리고 ―――― 최승자의 시 세계 이따금 최승자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첫 시집이었던 『이 시대의 사랑』의 시들이 그랬다. 온통 비극뿐인 세계 안에서도 움츠러들지 않고, ― 분노하고 발악하며 때론 냉소적으로 ― 강단 있게 맞서 나가는 모습에서 묘한 힘을 얻었던 지난날의 기억이 뇌리에 박힌 이래로 쭉 그래 왔다. 작년에 펴낸 『빈 배처럼 텅 비어』의 시들도 곱씹어 읽어 보았지만, 지금의 나에겐 초탈한 인간보다는 사투하는 인간형이 더 매력적이고 훨씬 끌렸으므로 첫 시집에 유독 손이 갔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1984년 발간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즐거운 일기』를 펼쳐 보았다. 역시나 시인의 젊은날에 쓰인 시들은 최근작에 비해 한층 호기롭게 절망을 마주한다. 비극의 절정에서 한결 빛을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