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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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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스스로의 몫을 고민하며 
온 마음으로 써내려가는 7편의 긴 편지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포함하여 일곱 편이 수록돼 있다. 모두 읽고 나서 깨달은 것이 내가 유독 인물들의 마음을 가늠해 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어찌하여 그들이 품었던 마음에 이토록 침잠해 있던 걸까. 마음속에 자리한 어떤 기억이 그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알게 모르게 영향 미치고 있음을 조금은 쓰린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갑자기 매서워진 계절의 탓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나는 기억의 자리를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 01.「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외적으로 장애물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나아갈 수 있을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때때로 가늠해 보곤 한다. 이 불안의 시간들이 빚어낼 빛의 순간을 그리며. 희원은 지난날의 젊은 여 강사를 떠올린다. 그러고는 비로소 그녀가 했던 말줄임표 뒤의 진심을 깨닫는다. 더불어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쏘아 올린 빛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서야만 한다는 사실 역시도. ‘…자기 목소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p.79) 했던 그녀의 말이 그 길의 출발점이 되리라.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난 희원씨가……”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다음 문장이 어떻게 완성되었을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떤 문장이든, 그녀는 내가 자신보다는 나은 경험을 하기를, 자신이 겪었던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자 힘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한다. 자신의 조건을 탓하지 않고,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인지하면서도 인정은 하지 않으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 마음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 p.41, 42

 

 

 

# 02.「몫」

“당신을 깨우고, 다독이고, 당신의 확신을 의심하게”(p.81)했던 희영은 정작 “가끔 고립감이 들었”(p.81)다고 해진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희영은 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알아보았고 외면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것은 조용하지만 묵직한 신념을 지키는 일이기도 해서 숭고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해진이 목격한 “외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p.80)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된다.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 p.79

 

 

 

# 03.「일 년」

삼 년 차 사원 지수는 일 년 계약 인턴인 다희와 업무 차 카풀을 하며 그녀의 허물없는 태도에 불편해 하면서도 계속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에 스며들며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p.101)고, 그러나 그건 이미 팔 년 전 일이다. 이후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했을 때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퇴원할 때까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끝내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는 않았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p.124)기에. 문득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마주했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순간 누구보다도 마음이 통했고 그래서 때로는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했던 스쳐간 인연들…… 그러나 더는 서로의 삶에 내어줄 자리를 잃고 말았기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인연들이 그저 제 삶에서 안녕하길 바라며.

 

(…)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 p.123

 

 

 

# 04.「답신」

오래 전 검은색 세단에서 내리는 언니를 처음 봤을 때, 따져 묻지 못한 것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괴로워하고 있던 걸까. 지난날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애쓰던 마음 —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p.150) — 은 결코 최선일 수 없었음을 줄곧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언니를 지켜내고 싶었던 ‘나’는 형부에 대항해 언니를 구출하고자 했지만 상황을 부정하는 언니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행동을 할 거”(p.170)라고 말하는 그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향한 그 마음에 대하여.

 

나는 대답해.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니까. 왜? 너는 말간 얼굴로 내게 다시 묻지. 그럼 나는 답해.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 p.178

 

 

 

# 05.「파종」

이혼한 민주와 그녀의 어린 딸 소리에게 텃밭 가꾸는 일을 도와 달라 청한 오빠 민혁. 밭을 일궈 씨를 뿌리고 김을 매며 물을 주는 수고를 통해 싱싱한 열매를 얻기까지, 그 과정 안에서 제 마음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고생스럽지만 정성껏 보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그녀들 곁에 민혁은 존재하지 않고, 텃밭 역시 적잖은 시간을 방치해 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텃밭에서 삼촌과의 즐거운 추억을 간직해 온 소리의 글을 통해 민주는 다시금 텃밭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렇게 그가 없는데도 다시금 제 마음을 돌보러 텃밭으로 향하는 민주와 소리 모녀. 어쩐지 나는 자꾸 그녀들의 모습을 흐뭇한 마음으로 그려보게 된다.

 

우리는 작은 텃밭을 함께 가꿨다.    - p.183

 

 

 

# 06.「이모에게」

희진은 이모가 남긴 단출한 살림 속에서 지난날 이모 방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던 장롱을 떠올린다. 제 것 보다 식구들의 물건으로 가득 찬 커다란 장롱 탓에 비좁았던 이모의 방, 그럼에도 불평 한 번 없던 그녀를 떠올린다. 어쩌면 이모는 장롱 옆에 몸을 뉘일 때마다 제 삶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것 보다 타인의 것을 더 이고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떠올리곤 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그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방에서 생활하며 희진을 키워냈다. 자신의 삶과 달리 성공적인 희진의 삶을 위하여. 희진 역시 때때로 매정한 이모를 원망하면서도 그녀를 좋아했다. 점차 이모를 닮아가는 제 자신 역시도 좋아하게 되기를.

 

이모는 천천히 내 곁으로 와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에 단 한 명,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이모였으니까. 그건 내 자존심이자 이모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 p.261

 

 

 

# 07.「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자신을 위로하는 손자 마이클의 “부끄러워요?”(p,318) 하는 물음에 기남은 생각한다. 부끄러웠던 지난날의 자신에 대하여.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다정한 그녀의 성정 탓에 느끼는 부끄러움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아들 없는 집의 여섯번째 딸로 태어나 아홉 살 나이에 남의 집 식모 일을 해야 했던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상처와 결핍이 어쩌면 그녀 자신을 지나치게 채근했던 거라고 말이다. 홍콩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그녀가 이제는 진경과 우경의 엄마, 마이클의 할머니이기보다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길……, 응원하게 싶다.

기남의 마음에는 사라지지 않는 방들이 있었다. 언제든 그 문을 열면 기남은 그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 기남은 살면서 수시로 그 문을 열었다. 문을 열 때마다 기억의 세부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의 통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을 열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여전히.    - p.306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8점
최은영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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