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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4

호로요이의 시간 | 오리가미 교야 외 | 징검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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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일본 여성작가 5인이 술을 소재로 그 종류만큼 다채롭고
해가 갈수록 깊어지는 인생을 그려낸 단편집

 

 

 

술을 소재로 한 일본 여성작가 5인의 단편집이다. 권남희 번역가의 산문집 『스타벅스 일기』에서 “주량은 약하지만, 나도 술을 좋아해서 술 이야기를 번역하는 일이 즐겁기 그지없다”(p.19)는 문장을 읽고서, 나 역시 호로요이(기분 좋게 취한 느낌)의 시간을 애정하기에 더욱이 『낮술』의 작가 하라다 히카 외에는 초면인 작가 구성에 호기심을 느껴 읽어 보았다. 결과적으로는 신선하고 유쾌하게 읽었는데, 무엇보다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는 사카이 기쿠코의 단편 「첫사랑 소다」는 나도 모르게 큰 웃음이 날 정도로 재밌게 읽어 그녀의 또 다른 소설 역시 소개되기를 기다리게 됐다.

 


# 01. 「그에게는 쇼콜라와 비밀의 향이 풍긴다」, 오리가미 교야

소중히 음미하듯 단 하나의 초콜릿 봉봉을 입에 넣곤 했던 이모 도와코 씨가 마음속 깊이 품었던 비밀은 그녀의 조카 히나키가 오래된 사진 속 사쿠라 씨를 찾아감으로써 해소되었다. 그녀의 집을 나서면서, “과자와 양주 향을 풍기며 최대한 우아하게, 반듯하게”(p.58) 걸어 나가는 히나키의 머릿속은 도와코 씨가 오랜 세월 소중하게 간직해 온 인연에 대한 진실을 비로소 알게 돼 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가득했으리라. 앞으로 히나키는 “달콤하게 신기한 향”(p.14)이 나는 봉봉을 입에 넣을 때면, 이 날의 따뜻한 기분을 떠올리지 않을까.

 

알코올이 든 봉봉은 도와코 씨가 우리 집에 올 때 가져오는 단골 선물이었다. 술이 들어가서, 하고 도와코 씨는 내가 한 개를 다 먹지 못하도록 반으로 나눠주었다. 맛있어요, 더 먹고 싶어요, 그랬더니 “히나키는 나중에 술을 잘 마시겠구나.”하고 웃었다. 도와코 씨네 집에 놀러 갔을 때도 봉봉 상자가 있었다. 이때는 엄마에게 비밀로 하기로 하고 한 개를 다 먹게 해주었다. 달콤하게 신기한 향이 나는 걸쭉한 크림이 맛있었다. 어른이 되면 실컷 먹을 수 있겠지만 그날이 너무 아득했다. 하지만 도와코 씨는 어른인데도 봉봉은 한 개밖에 먹지 않았다. 딱 한 개만, 아주 소중한 듯이 음미했다. “이 초콜릿을 굉징히 좋아한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가르쳐준 가게야, 여기.”    - p.13, 14

 

 

 

# 02. 「첫사랑 소다」, 사카이 기쿠코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음미하기는 커녕 외려 인심이라도 쓰듯 비워내는 야마시로를 바라보는 카호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도 화가 나는 일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그녀가 내놓은 딸기 위스키 소다와리가 첫사랑의 맛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서둘러 그를 집에서 내쫓다시피 하는 카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한참을 배꼽 잡고 웃었다. 나는 그녀의 빠른 판단과 행동력에 감탄했다. 그녀의 결심을 응원한다!

 

열두 살 카호의 천진난만한 물음이 떠올랐다. 결혼을 막연히 동경했던 그 아이에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가정을 갖는 것이 여자의 인생 전부는 아니란다. 잔을 내려놓고 카호는 뒤로 기지개를 켰다. 결정했다. 내일부터 진지하게 맨션을 찾자. 조건은 오로지 내가 편안한 집, 그것만 보고 고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혼자 즐기기 위한 술을 담그자. 달지만은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맛있어지는 게 있다는 것을 지금의 카호는 알고 있다.    - p.107

 

 

 

# 03. 「양조학과의 우이치」, 누카가 미오

가업을 이어 3대 사쿠라바 주조의 주인이 될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코하루. 그럼에도 그녀는 일본농업대학교 양조학과에 입학했다. 부모의 강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가 지켜온 ‘봄의 연주’에 대한  — 비록 지금은 그 맛의 가치를 온전하게 알지 못함에도 — 깊은 애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집안의 외동딸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 역시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쓴맛과 알코올의 무게에 무의식적으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봄의 연주는 어젯밤보다 훨씬 가볍게 코하루 속으로 들어갔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니 아침 공기 너머로 황금빛 들판이 보였다.    - p.156

 

 

 

# 04. 「식당 자츠雜’」, 하라다 히카

사야카는 식당 자츠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알게 된다. 밥과 함께 즐기는 술의 매력에 대하여. 사실 우리는 저마다 선호하는 것이 있는 반면 경멸하다시피 꺼려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무조건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보다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이다. 더욱이 가까운 상대라면 그 사람의 취향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 역시 상당히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야카가 뒤늦게나마 그런 유연함의 필요성을 마음 깊숙이 깨달은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러나저러나 식당 자츠의 수제 크로켓에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 밤이다!

“맛있네요. 밥과 술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조금 평온함조차 느꼈다. “지금이라면 맛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나,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남편도 알아주길 바랐을 뿐인데요. 강요만 했네요.”    - p.219

 

 

 

# 05. 「bar 기린반」, 유즈키 아사코

코로나로 매출이 떨어진 차에 동창 오츠카의 제의로 온라인 바의 바텐더가 된 아리노. 애초의 기대와 달리 그곳은 오츠카를 비롯하여 유치원 기린반의 학부모들이 각자의 집에서 편한 차림으로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이런저런 푸념을 털어놓는 시끄럽고 정신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에 어울리는 칵테일을 선보이며 학부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그는 모임 횟수가 늘어날수록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코로나 감염이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멀게 했지만, 그럼에도 온라인을 통해서 나마 서로에게 위안이 돼 주는 사람들의 정겨운 모습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달콤한 칵테일은 왠지 좋죠. 그야말로 밤의 자유로운 시간이란 느낌…….” - p.244, 245

 

 

 

 

 

호로요이의 시간 - 8점
유즈키 아사코 외 지음, 권남희 옮김/징검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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