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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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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 마음산책 줌파 라히리의 첫 소설집 퓰리처상, 펜/헤밍웨이상 수상작 인간 존재와 그 내면, 나아가 그들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인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 하에 직면해 있는 등장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분노하고 실망하며 당혹스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보람과 기쁨, 안도감을 맛보기도 한다. 또한 타인의 새로운 시선을 통해 익숙했으나 낯설어진 세계에 맞닥뜨림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하루를, 일 년을, …그렇게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이야기 끝에서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새로이 시작된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각기 사정과 처해 있는 상황이 다름에도, 우리..
강이 | 이수지 | 비룡소 ‘검은 개’에서 ‘강이’로 살았던 일상을 담은 아름다운 그림책 펑펑 눈 내리던 어느 날, 산이와 바다를 향한 강이의 내달림이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그 안에서 새삼 작은 생명체와의 교감, 그 애틋하고 기적과도 같은 시간들에 대하여 헤아려 보자니, 짤막한 스토리가 무색하게 가슴에 남는 여운은 길고도 진하다. 더욱이 검은색 오일파스텔로만 표현한 감각적인 그림들은 간결하면서도 새하얀 바탕과 대비되어 한층 강렬하게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계절의 탓일까. 눈 쌓여 온 세상이 하얬던 날,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하고 홀연히 떠난 우리집 막내 생각이 간절해지는 요즘이다. 그래서 산과 바다, 강이의 추억이 한결 따스하게, 코끝 찡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그 애를 만나고, 머리를 맞대어 이름을 붙여주었던 그날의 ..
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 무레 요코 | 이봄 눈치 볼 것 없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하지 않는 법’에 대한 에세이 60대에 접어든 저자가 여태껏 독신 여성으로서 살아온 삶, 그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책 제목과 같은 마인드가 자리한다.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사회에서 의례히 요구되기 마련인 여성상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진짜 그녀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 지극히 마땅한 일이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어느 순간 되돌아보면 주위 시선, 사회의 암묵적 요구에 휩쓸리고 마는 일상 안의 자신을 마주할 때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때에 마주했던 당혹스러움과 그로 인한 피로감과 자괴감은 한동안의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곤 했다. 이와 같은 여러 차례의 부침 안에서 나는 결..
아침 그리고 저녁 | 욘 포세 | 문학동네 침묵과 리듬의 글쓰기 명료한 언어로 포착해낸 전 생애의 디테일 두 장으로 나뉜 이 소설의 첫 장은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네스의 출생의 순간을 묘사한다. 혹여 출산하는 동안 어떤 문제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곧 태어날 자식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 남자(올라이)의 독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한 생명이 맞이하고 있는 생의 아침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장에서는 장성한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노년의 요한네스를 그린다. 아내와 절친했던 친구를 앞서 보내고, 이제는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생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저물어 가는 생의 저녁에 자연스레 비유될 수 있겠다. 한편 이 이야기는 마침표 없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문장..
그 사랑 놓치지 마라 | 이해인 | 마음산책 수도원에서 보내는 마음의 시 산문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마주할 적이면, 곧잘 고해소 앞에 선 심정이 되곤 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상기시킴으로써 지난날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혼자 가만히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 다짐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들은 잠시 방황하고 주춤했던 나를 슬며시 깨운다. 마치 보석을 마친 뒤 한결 말갛게 씻긴 내가 되어. 이 모든 것은 수녀님의 시와 산문이 선사하는 신비랄 수밖에. 올해 연말과 내년의 연시도 수녀님의 새로운 책과 함께 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살아갈수록 말을 더 조심조심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 삼아 가볍게 던진 말이 커다란 오해의 무게로 돌아와 상처 받고 눈물 흘린 시간들이 제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