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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책/2015

환상의 빛 | 미야모토 테루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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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알라딘]

 

 

 

돌아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대답만 해주세요.
왜 당신은 아무 말도 없이 제 곁을 떠나갔는지를…… 

 

 

마음에 꼭 드는 한 편이었던 『환상의 빛』.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중편으로, 스토리 자체는 굉장히 간결하다. 그러나 그 뒤에 남는 여운은 실체 없는 무언가에 단단히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강렬함이 있다. 어째서 일까.

어느 날 홀연히 자살한 남편. 아내는 칠 년이 지난 오늘까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살아 걸어가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좇으며 곁을 떠난 이유를 묻고 또 묻는다. 그러나 남편에게선 어떠한 대답도 들을 수 없다. 그저 긴 터널과도 같은 어둠의 시간만이 지속될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빛은 점점… 커져, 어느새 자신의 발밑까지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터널이 언제 끝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게 남겨진 자의 숙명 같은 것은 아닐는지. 결국 그 시간들은 먼저 떠나간 자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부단히 애쓰는 인내의 시간인 동시에 남겨진 자의 버텨 살아가기 위한 투쟁의 시간이며, 차츰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독이는 치유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전 그 사람이 왜 자살했는지, 왜 레일 위를 걷고 있었는지,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돼요. …… 저기, 당신은 왜라고 생각해요?"
 (…)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 p. 79

 

 

 

사람의 몸과 마음 혹은 그 이상의 내면 깊은 곳까지도 좌지우지하는 '혼'이 빠진다는 것은 어떤 찰나에 찾아오는 것인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 안에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아내의 고백에 더욱 넋 잃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아있음의 매 순간이 때론 잔잔하고 때론 성난 바다와 같은 것임을 이제는 분명하게 알기에 그 '혼이 빠진다'는 표현에 불현듯 뒷걸음쳐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근조근 그리고 또박또박 적어 내린 아내의 고백과는 상반되게 도리어 작가가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책을 덮는 순간 시작됐다.

 

누구나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다다르기까지 타인의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기 마련이다. 떠올려보면, 삶과 죽음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했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차츰 삶과 죽음이란 게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한 부분으로써 '죽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나에겐 이 둘의 불분명한 경계가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현실에서 더이상 대면할 수 없다는 것은 추호의 거짓 없는 진실이지만, 떠나간 자와 남겨진 자 사이에서 생성됐던 것들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기에 결코 허튼소리는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환상의 빛』에서만 해도 그렇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있고, 사소한 기억과 소중한 추억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렇기에 죽은 남편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좋을지 몰라 손을 놓을 수 없었던 『환상의 빛』. 읽은 시간만큼 멍하니 앉아 있게 만들었던, 그야말로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환상 안에서 마주한 빛과도 같은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어쩐 일인지 나를 안도하게도 한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p. 82

 

 

 

『환상의 빛』 이외에도 「밤 벚꽃」, 「박쥐」, 「침대차」가 수록되어 있는데, 각기 대상은 다르지만 '죽음'을 소재로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역시 그들이 잃은 것은 대상 그 자체의 부재라기보다는 남은 이들의 슬픔과 외로움, 불안을 포괄한 '살아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많은 생각들을 남긴다.

 

 

 

 

 

환상의 빛 - 10점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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